'좁은 문', 자비와 성장의 통로

2016. 9. 1. 오전 6: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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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자비와 성장의 통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오늘 예수님은 '좁은 문'을 비유로 들면서 구원의 가능성에 전제를 걸어두십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 좁고 작은 문은 대문에 딸린 '비밀의 문'으로써 큰 문이 닫히는 시간, 곧 통행이 자유로운 시간이 훨씬 지난 이후에도 집안 식솔들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파수꾼이 순찰하기 직전까지 이 좁은 문은 여전히 개방된 상태입니다. 이는 집주인의 마지막 배려일 수 있습니다. 꽤 시간이 지나 식솔들이 모두 안거해 있으리라 생각한 집주인은 마지막으로 집 안팎을 돌아보고 최종적으로 이 '좁은 문'을 완전히 닫아 빗장을 걸어둡니다. 이제는 누구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집 주인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고 배려해준 그 시간을 훌쩍 넘어 대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들은 분명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였고, 오병이어의 사건 때에도 양식을 나눠 먹었으며, 때론 군중심리에 휩쓸려 예수님께 더 큰 표징을 요구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신앙에 있어 개심(開心)하고 개안(開眼)하도록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정도면 예수님과의 친분을 내세워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루카 13,27)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진솔한 신앙의 실천 여부와 관련 깊습니다. '성장하는 신앙'은 단순히 어떤 현장에 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 수동적으로 듣는 것만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복음의 표현처럼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좁고 작은 문이라도 열고 들어가도록 '힘쓰는'(루카 13,24 참조)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투신하는 것이고, 듣고 가르침만 받은 것이 아니라 이를 능동적으로 실천에 옮기면서 '애쓰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악전고투를 겪으며 뿌리내리는 것이 신앙이고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은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향해 뒤늦게라도 찾아 들어가야 하는 신앙의 실천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바라만 보고 듣기만 하면서 의미 없이 무한반복 오가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결단을 내리고, 부족해도 생활 속 작은 실천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기쁨을 누리려고 애쓰는 모습입니까? -박현창 (베드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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