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위로부터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의 대화를 보면, 어떻게든 그들을 깨닫고 이해시키려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영(靈)으로 알아들어야지 육(肉)으로 알아들으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나 군중은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올 수 있나?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놓을 수 있는가?" 라며
육신적으로만 알아 들으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과 피를 주시는 예수님(성체)를 육으로만 국한시키지
않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요한 3,7),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과 교회,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인간관계 안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아래(肉)에 머물러 있는 삶의 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되돌아봅니다.
특별히 정치적인 견해에 따라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가 갈라지는 현상을
보기도 합니다.
하나의 세례, 하나의 신앙,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인 교회 공동체의
신앙에 의해서 '세상(肉)과는 달리 예수님과의 깊이 일치된 방향(靈)에
서 있는 공동체를 희망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인가?
아니면 정치사회를 너무 단순화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옵니다.
육(肉)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에 직결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도 보수적인 자본주의자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처하는 사회일지라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정치사회의 관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각자는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그쳐져야 하겠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현장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오시는 예수님
(요한 6,16-21)처럼 우리는 군중이 머물러 있었던 육의 세계에서
신앙의 세계로, 성체에 대한 신앙의 세계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이며 생명"인 말씀을 육이 아니라 영으로 알아듣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성체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누릴 수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성체)의 생명에 대한
이해가 더 완전해집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는 생명이 마지막 날에 완성될 그 영원한 생명과
닮아갈 것입니다.
미리 그 생명을 맛보게 해주시기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신앙 안에서 그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인전을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온갖 방탕의 삶을 산 사람이 성인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기쁨의 환희 속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삶의 마지막에 회개를 통해 잠깐 동안 신앙이 주는 생명과
기쁨 속에 임종을 맞이한 그 사람이 오히려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요?
'주님이 주는 이 놀라운 생명을 겨우 한순간 만 맛보다니!' 라고
아쉬워하며 아직 시간이 있는 우리를 부럽다고 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 6장의 결론은 '살과 피로 오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지 못한다면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귀에 거슬리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김도연 야곱 신부(해외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