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이 아닌 일치를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이루신 일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주일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자비롭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삼위가 이루신 일치 역시 그렇다.
일치를 자주 거스르기 때문에 삼위일체교리는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믿을 교리'라며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또한 평소 일치를 잘 살지 못해서인지 '일치'를 '획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들도
많다.
일치를 획일로 이해하게 되면, 약자나 소수의 의견이 자주 묵살된다.
사회 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발전이나 효율을 위해, 심지어는 애국이란 이름으로도
일치와 단결을 주장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일치'가 아니라 '획일'일 때가 있다.
그리고 획일은 어느새 '전제(專制)' 혹은 '독재(獨裁)'로 바뀌곤 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점점 활기를 잃고, 빼앗긴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뒤늦게 그리워한다.
우리가 일치를 이야기할 때 '조화'의 개념을 함께 기억할 수 있으면 훨씬 좋을 것이다.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의 조각들이 모여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완성되듯이, 일치는
다양성이 충분히 고려될 때 본래의 가치가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엔 부조화한 모습이 많다. 선과 악이 내 안에서 공존하며 일으키는
분열을 볼 때, 평화를 외치면서도 반전(反戰)에 대해선 침묵할 때, 발전과 경쟁을
주장하지만 공정함에 대해선 회피할 때, 자선사업엔 적극적이지만 가난의 구조에
대해선 외면할 때 우리 안의 조화는 깨져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런 부조화한 모습이 조화를 찾기 위해선 일종의 분열의 시간을 피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불과 칼을 세상에 주러왔다고 하신 것처럼, 고통스럽고 수고스럽지만 토론하고
고민하고 때론 갈등하는 시간을 일정부분 감수해야한다.
아무도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진정한 단결이 아닌
것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일치는 강제적으로 혹은 비겁하게 꾸며진 일치인
것이다.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공동체가 성숙해지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교회
역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제2독서에서처럼, 초대교회시절 일치를 부르짖으며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갈 것을 간절히 호소했던 바오로 사도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분열과 거짓이 공동체를 파괴하려할 때 사도는 끊임없이 설득하고 토론하고 기도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알고 체험한 사도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교회는 이천년
동안 일치를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해외 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