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그림성인전9

2006. 12. 29. 오후 4:44:16

글자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이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는 이 땅에서의 10년 간 사목활동 중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혹독
했던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로 서품되어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월남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어 만주 요동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
며, 그곳에서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그는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
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그런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장 주교는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는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서, 김 세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장 주교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한국 성은 백(白),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 사제가 된 백 신부는 서품되자 곧 동료
김, 민, 서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의 고백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잡힌 이튿날인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끝에
3월 7일 새남터에서 장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
이 땅에 온 지 채 1년도 못되는 이 젊은 사도는 땀보다는 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 현양하였다.






한국성은 김,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배속되었다.


김 신부는 순교 때까지 운명을 같이 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천성이 온순
하고 친절하여 한국말은 아직 서툴렀으나 교우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낸 8개월 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손골에서
잡혀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장 주교, 백, 서 신부에 뒤이어 네 번째로
참수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에 불과했다.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
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
(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일명 ‘승연’으로도 불리는 성 전장운 요한은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생계를 농사와 분상(粉商)으로 꾸려나갔다.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구류간에 1개월 동안 갇힌 적이 있었으나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후 열심한 어머니의 권유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다. 그러나 신부가 없어 고해
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던 중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그후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에 의해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하게 되어 최형 베드로,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 장만하는 일을 담당했으나 얼마 후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적발되자 이로 인해 3월 1일 체포
되었다.


포청에서 1회의 신분, 의금부의 국청에서 9회의 신문과 2회의 형문, 그리고 신장
32도를 맞은 후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나이는 56세였다. (87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 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86과 함께 체포됨)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嬰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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