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시명'으로도 불리는 김제준은 충청도 면천 땅 솔뫼 에서 태어났다. 1814년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 으로 입교한 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했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의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8월 김제준은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 (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 의해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제준은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는 허약을 보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1은 아들)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봉손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은 원래 계모의 오빠인 김사문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가난한 여러 가구의 교우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했으나 박 봉손은 그런 가운데도 솔선 하여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함께 살던 교우들은 모두 피신하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던 중 7월초 마침 집에 들렸던 외삼촌과 함께 체포 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박봉손은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다.
그는 형관에게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홍금주 페르페투아는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약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결혼한 후 냉담했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후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았을 뿐더러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이해 4월 최 필립보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과 형벌을 받았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조 옥에서 홍금주는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했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처매주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었고 이로인해 함께 갇힌 교우들은 홍금주를 친누이처럼 생각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사랑과 봉사로써 일관하던 홍금주는 옥살이 6개월 만인 9월 26일 36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효임 골룸바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전가족이 다 함께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두 여동생 김 효주(아녜스),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을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매주 두 차례의 재(齋)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니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감탄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4월 김효임은 그간 이사한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효임은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대라는 관헌에 의해 동생과 함께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두 자매는 소위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몸의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형조로 이송되어 형조 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신문이 끝나자 효임은 포청에서 겪은 법외의 고문과 능욕에 항의했다. 이 때문에 포청에서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후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신보다 20여 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30은 동생)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 였다.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어떠한 천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71세의 고령이라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7월 어느날 포청에서 기력이 쇠하여 숨을 거둠으로써 옥사, 순교하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한 이 가타리나는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 때문에 14세 때 조(趙)씨란 성을 가진 외교인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가타리나의 권고로 남편은 대세를 받고 사망하였다. 1838년 말 고향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가타리나는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상경하여 조 바르바라 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큰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딸과 함께 문초를 받고 한 차례의 주뢰질을 당한 후 옥에 갇혔으나 옥이 워낙 비좁고 불결하여 체포된 지 3개월 후인 9월 어느 날 57세의 나이로 염병을 얻어 옥사. 순교했다. (47은 딸, 47, 56, 66과 함께 체포됨)
 어려서 어머니 이 가타리나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조 막달레나는 외교인 친척들의 반대로 7, 8세경부터 교우 집안인 외가에 가서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세 때 혼담이 오가자 수정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서울로 와 5, 6년 을 지냈다.
그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8년 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가산 을 버리고 서울의 조 바르바라의 집으로 피신했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어머니 이 카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한 차례의 신문과 주뢰질을 당한 후 옥으로 끌려간 조 막달레나는 3개월 동안 비좁고 불결한 옥살이 끝에 33세의 동정녀로 염병을 얻어 옥사, 순교했다. (46은 모친, 46, 56. 66과 함께 체포됨)
 유진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를 미워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항상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동적인 순교를 하자 유대철은 순교를 결심하고 자헌했다. 포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 에게 "믿고 말고요.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 하자 화가 난 형리는 다시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포청에서 총 14회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게 되자 10월 31일 포청옥에서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35는 부친)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인 유 체칠리아는 시골에서 태어나 2O세 때 상처한 정약종과 결혼했다.남편의 권면으로 결혼한 지 3년만에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0년 살고 있던 경기도 양근(楊根)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로 가족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 (丁哲祥)의 순교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석방되어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유 체칠리아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의 피신 권유에 "나는 항상 순교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 하고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태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했다. 그녀는 103위 가운데 최고령의 순교자이다. (2, 54의 어머니)
 일명 '여칠'.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교리를 배워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30세경 교우인 손소벽(막달레나)과 결혼한 후로는 새로 교리를 배우고 또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았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했다. 이해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바르바라)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맡겨둔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7차례의 신문, 주뢰질, 주장 외에도 태장 150도를 맞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64는 아내, 70은 딸, 40은 사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