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박희순 루치아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15세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후 궁녀의 신분으로는 천주교 봉행이 어렵게
되자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3월말 박 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전경협(아가타)의 집으로 피신
했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포청과 형조
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배교했으나 박 희순만은 언니,
전 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25는 언니, 25. 39와 함께 체포됨)
'문화'로도 불리는 남명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는 열심을 더해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또 '성의회'
(聖衣會)라는 신심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열심히 교회 일을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 교우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서양 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를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
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 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려지길 원했던 성의회원 남명혁은 자신의 원대로 한창
나이인 38세로 순교하였다. (29는 처)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 베드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윈 후 결혼했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
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신앙으로 인해 권 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처남,아내,어린 자녀
등 4명와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후 권득인은 5개월 동안 옥중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고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17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예비 교우로 생활했다. 그러나 점차 교리에 대해 회의를
품어 신앙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교우 친구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이후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연구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그렇게 방해되느냐?"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의식(衣食)을 얻어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렇게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 성집은 l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했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몇일
후인 4월 7일 체포되었다.
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했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
과 고문을 참아냈다. 그후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도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는 13세 경 상경하여 부유한 교우인
황 마리아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 그때부터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수정(守貞)을 결심했으나 혼기에 이르러 부모의 강요로
외교인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3월 김 바르바라는 몸 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거기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3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청파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로는 서울의 이 영희, 이 정희 두 이모에게 의탁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
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고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꿋꿋이 참고 인내하며 함께 갇혀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
로 순교했다.(22,27의 조카)
과부가 된 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친정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신문 중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읍니다"
하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나이는 56세였다.(1,7과 함께 체포됨)
인천 부평에서 태어난 김 성임은 결혼에 한번 실패한 후 상경하여 장님 점장이
와 재혼했다. 이때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후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했다.
1839년 4월 11일 김 성임은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후 이미 체포된
남명혁(南明赫)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7,22,23,28,36과 함께 자수)
외교인 시절에 결혼한 이 매임은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의 친정으로
돌아와서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입교 후
이 매임은 조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를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어 조카
이영희가 수정(守貞)할 결심으로 외교인과의 결혼을 뿌리치고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839년 4월초 이 매임은 허계임, 이정희, 이영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김성임,김 루치아 등과 함께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 이들 5명의 여교우와 함께 순교
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천주교인
임을 밝히면서 자헌하였다. 이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 52세였다.
(36은 올케, 22, 28은 조카, 18, 22. 23, 28, 36과 함께 자수)
서울에서 태중 교우고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 (李光烈)과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고 마침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9, 21, 26. 58과 함께 체포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