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
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
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년
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37은 남편)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이 막달레나는 혼기에 이르러 권 진사라는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아가타)를 두었고 남편이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에 따라 딸과 함께 입교했다.
그후 신앙생활을 위해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다가 1839년
7월 17일 딸과 딸의 친구인 이경이(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67은 딸, 65, 67과 함께 체포됨)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은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이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관련되어
순교한 후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崔昌顯)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
으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친정 식구들의 생계를 도왔다. 항상 규칙적인 독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생활을 했고 뛰어난 교리지식과 열정적인 신앙으로 여회장
직을 맡아보며 무지한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며 외교인
자녀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교회 일에 적극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경련은 잠시 피신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동생 현석문(玄錫文)과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주뢰 2차, 300여 대의 장(77)을 맞는 혹형을 당했고, 형조에
서도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냈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信望愛)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많은 교우
들을 감동시켰다. 12월 29일 현경련은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는 동생)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딸로, 4세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오빠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후 마재의 삼촌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길쌀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7월 11일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도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정정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49는 어머니, 2는 오빠, 2, 49, 57과 함께 체포됨)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고,가정을 잘 돌보아
교우들로부터 모범 가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가정 뿐만 아니라 회장인 남편을 도와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
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으
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고 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아우구스티노) 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로 순교했다. (62는 남편)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어머니 조 바르바라,동생 이인덕(마리아)과 함께 천주교
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간 틈을 타서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수정을 결심한 후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아버지에게 써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
했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영덕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던 조
막달레나와 이 가타리나 모녀 등과 서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헌 할 겨를도 없이 6월 어느 날 이영덕은 습격한 포졸들에게
집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
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66은 동생, 46, 47, 66과 함께 체포됨)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
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 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의 당고모, 2, 49, 54와 함께 체포됨)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
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
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26의 딸, 9, 20, 21, 26과 함께 체포됨)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
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 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
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
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
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