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
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
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 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
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가타리나), 이간난
(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3은 누님, 77,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 베드로는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
바라와 결혼했는데 이때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그 즉시로 수계하기 시작
했다. 그후 서양 신부들이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하여 첩까지 거느리고 8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과거의 죄를 보속
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로 생활하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자주
하곤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
로 남경문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의 신분
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陽智)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 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난 우술임 수산나는 15세 때 인천의 한 교우와
결혼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2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풀려나왔는데,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육체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후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상경하여 교우들의 집에서 몸붙여 살다가 역시
과부인 이간난(아가타)과 함께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
나자 김 신부의 집에 있던 여교우들은 이 간난의 집을 거쳐 새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이 간난도 여교우들을 따라 새 집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우술임만이 남아 혼자서 이간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9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몸으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44세였다.
‘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 요셉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미 1830년에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호의적으로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대하기만 했다.
1846년 5월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 수영으로 가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했다.
며칠 후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처음으로 김 대건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고, 순교를 결심했다.
드디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포청 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이미 수정할 결심을 하고 그후로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2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 베드로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했고,
1839년 기해박해 후에는 이문우 요한의 양어머니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5년 동안 살았으며, 1845년부터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당시 회장이던 현석문 가롤로는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는데, 7월 11일
포졸들이 새 집에 들이닥쳤다. 이렇게 해서 현석문, 정철염, 이간난
등과 함께 체포된 김임이는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나이는 36세였다. (72,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간난 아가타는 18세 때 결혼하여 3년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외할머니의 권유로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로부터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이 간난은 현석문
가롤로 회장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었으나 7월 11일 피신해 있던 집에서
현석문, 김임이,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되어 9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상태로 6명의 교우와 함께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 77, 79와 함께 체포됨)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는 경기도 수원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포천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양반집 하인으로 들어 갔는데, 주인집 가족의
한 교우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0세 되던 해 동지날 주인으로부터 미신행위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거부함으로써 주인에게 혹독한 벌을 받았고, 이듬해 봄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자 그녀는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았다.
그후 1845년 김대건 신부의 하녀로 들어갔고,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
되자 현석문 가롤로 회장이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다가 7월 11일 현
회장, 이간난, 김임이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성녀 정철염은 용감히 이겨
냈다.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3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72, 77, 78과 함께 체포됨) 
성 유정률 베드로는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읜 후로 짚신을 엮어 팔아 어렵게 생활
했다.
1864년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교리를 배운 후 곧 상경하여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온 성인은 지난날의 방탕했
던 생활과 아내를 난폭하게 학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신 꼬리로 자신의 몸
을 매질하며 오직 극기와 인내로 생활했다.
그의 아내도 이렇게 변화된 모습에 감동하여 남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이나 한 듯 "안녕히들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
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하고 하직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날 저녁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읽고 있던
중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같이 체포된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 알렉시오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그는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할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했으나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은 배교 한 교우 100여 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했다.
결국 유정률은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른바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한 것이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했다.
이러한 성 유정률 베드로의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
(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