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그림성인전10

2006. 12. 29. 오후 4:48:28

글자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3월 23일 사형
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갈매못’에서 안 주교,민 신부,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안 주교를 체포할 때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기별을 받았
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서 그는 혼자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덕산 관장은 손자선이 천주교인임을 알고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
했으나 굴하지 않자 해미로 보냈고, 해미에서 손자선은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손자선은 5월 18일 공주옥에서 2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일명 '계식'으로도 불리는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고 있었다.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원 5일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한재권 등과 체포되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로 순교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
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고 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했다. (98, 100과 함께 체포됨)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곧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다.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1864년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했고 아내가 사망하자 김 수산나와 재혼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전라 감사의 지시로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서 조화서는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아들을 격려했고, 아들 윤호는 "저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하고 격려하며 부자가 서로 순교를 각오했다.


6, 7차의 신문을 아들과 함께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거부하고,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아들 윤호도 10일 후인 12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102는 아들, 99, 101, 102와함께 체포됨)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96, 10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서는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읍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7, 101, 102와 함께 체포됨)






성 한재권 요셉은 태중 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나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박해로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 직책없이 교회 일에 충실했다.


1866년 12월 5일 한재권은 전라 감사의 명으로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에까지 찾아와 배교 할 것을 간청했으나 한재권은
"아버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교했다. (96, 98과 함께 체포됨)






일명 '원조'로도 불리는 성 정원지 베드로는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전주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지방으로 이사했고,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화서가 체포되던 날인 1866년 12월 5일 정원지는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 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끌고가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다.


지극한 효성 때문에 노모를 생각하고 여러 번 눈물을 흘리다가 함께 체포
된 성지동 교우들의 위로와 권유로 끝까지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다.
드디어 12월 13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97, 99, 102와 함께 체포됨)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
났다.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했다.


1866년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아버지와 함께 6, 7차의 심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곤장 16도를 맞은 후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7은 아버지, 97, 99, 101과 함께 체포됨)






일명 ‘제헌’으로도 불리는 성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자 11월 가족, 마을의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3일 간 혹형과 고문을 받은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 소위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다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형이 집행
될 때까지 기쁨과 여유를 갖고 기도하며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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