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5
불교의 구원관 - 최종석 교수
1. 머리말
불교는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종교이다. 당시 인도는 사상적으로 혼란한 때였다. 많은 종교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가르침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열 가지 종교가 서로 다른 열 가지 진리를 주장한다고 해서 진리가 열 가지가 되고, 백 가지 종교가 백 가지 주장을 한다고 해서 백 가지의 진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하고 석가모니는 문제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의 많은 종교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가운데에는 그 가르침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자신들이 믿어온 신이나 성인의 가르침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Buddha)는 당시의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때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대부분 고정된 관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붓다는 그런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모든 편
견과 집착에서 벗어나 정말 어느 한편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찾게 되었고 드디어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의 진리를 다르마(Dharma), 곧 법(法)이라고 한다. 이 깨달음이 인간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신(神) 중심의 종교는 인간의 구원이 자신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적이었다. 인간의 역사와 운명도 인간 아닌 절대적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불교는 증명할 수 없고 검증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무명, 곧 무지에서 생긴다고 보았으며, 깨달음은 무지로부터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해탈이라고도 한다. 결국 불교에서 궁극적 구원이란 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2.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
불교는 인간의 상상과 추측을 바탕으로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현실 세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문제부터 꼼꼼하게 따져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해결한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 광활한 우주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가 산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쉼 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눈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푸른 하늘의 구름도, 바다에 펼쳐지는 수평선도 모두 눈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별들도 눈을 통해서 만나고, 아주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도 눈으로 알게 된다. 눈으로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만남은 눈말고 귀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과 만나게 되고 그 소리를 통해서 갖가지 다양한 소리의 세계를 알게 된다. 우리는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다시금 우리는 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 냄새를 맡게 되고 그 냄새들이 서로 다른 것도 알게 된다. 또한 입으로 들어와서 우리와 만나는 다양한 음식들을 혀로써 그 맛을 보고, 그것이 짠지 신지 매운지 하면서 음식의 맛을 알게 된다. 이것 또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통해서 덥다거나 춥다거나 아니면 부드럽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촉감들을 느낄 수 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끊임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서 무언가를 자꾸 알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만나서 만들어진 경험 세계 이외에도 인간은 의지를 갖고 있다. 이 의지는 인간이 주체적 존재라는 특질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자연은 객체적 존재의 특징인 법(法)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의지(意志)를 통하여 각각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와 이 세계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이 세계는 확실한 세계로서 여기 있는 나와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을 합한 세계, 곧 일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 곧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성질에 대하여 불교는 대체로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 “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변한다”[諸行無常]라는 것이다.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무상(無常)이란 말을 덧없다거나 허무하다라는 뜻으로 알고, 마치 불교의 가르침이 허무주의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제행무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뜻이다. 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미 생성된 것이 파괴된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만 무상이 아니라 말기 암환자가 병을 극복하고 건강해진 것도 무상이라고 한다.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날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고,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이 변하고 인간이 늙고 죽는 것은 그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죄악의 대가도 아닌 것으로 본다. 또한 무상이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만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법(法)인 것이다.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라고 파악하고 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망아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무아’(無我)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법은 무아’라고 할 때 이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게도 적용됨을 말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 딸기 잼(jam)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딸기 잼은 ‘무아’라고 한다. 왜냐하면 딸기 잼에는 딸기 잼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딸기 잼은 딸기와 설탕과 향료 등 여러 가지가 모여서 딸기 잼이 생성된 것이지 그 요소 하나만으로 딸기 잼이 될 수 없다. 이처럼 무아는 딸기 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다라고 본다.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원래 ‘힘이 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이다. 곧 고(苦)는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게 포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모두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것을 고(苦)라고 하는 것이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고(苦)라고 할 수 있다. 고(苦)는 모든 존재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지, 여기에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생성 원리
이미 앞에서 모든 존재,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無常〕, 실체가 없고〔無我〕, 그리고 고(苦)라고 살펴보았다. 그런데 비록 실체가 없고 변하는 것이라 해도 무질서하게 제 마음대로 변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물에 아무리 실체가 없다고 하여도 현실적으로는 엄연하게 법칙에 따라 각각의 성질을 나타내면서 존재하고 있다. 세계는 원칙이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만약에 이 세계가 법칙 없이 생성하고 변한다면, 참으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일대 혼란이 올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이 흐르고 싶을 땐 흐르다가 어떤 때는 안 흐르고, 사과나무에 사과가 안 열리고 배가 열리다가는 별안간 감이 열리고, 사계절이 뒤바뀌어 봄이 오다가 겨울이 되고 다시 가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다.
붓다는 이 법칙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곧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는 것이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과의 법칙’을 알아낸 것이다. 이 인과의 법칙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법칙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 깨달을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인과의 관계가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원인은 결과로 즉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원인은 수십년 또는 수백년이 지난 후에야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진행이 기계의 작동처럼 시간의 선후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원인이 결과 속으로 다시 투입되기도 한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는 복잡하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과의 법칙이 복잡하다고 해도 자연의 변화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인간 행위에는 다른 점이 있다. 인간 행위에는 의지(意志)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자연 법칙과는 다르다. 곧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의지가 담긴 행위를 인(因)이라 부르지 않고 업(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업에 따라 받는 결과를 보(報)라고 한다. 인간이 선업을 짓게 되면 선보를 받고, 악업을 짓게 되면 악보를 받게 되는 것으로 본다. 인간이 어떤 의지를 갖고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보(報)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기 스스로 짓는 만큼 자신이 받는 것이지,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만약에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붓다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들에게 법을 가르쳐서 그 법을 깨닫게 한 존재로 본다.
여기 인과의 법칙 중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여기에 치즈가 있다고 하자.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로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우유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우유는 그대로 우유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우유가 유산균과 만나 서로 어울려서 발효가 되면 치즈가 생겨난다. 이때에 우유를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을 연(緣)이라고 한다. 우유와 같은 일차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과 같은 이차적 원인을 연(緣)이라고 부른다. 이 두 원인이 결합해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인연 화합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점을 알게 된다. 곧 우유가 유산균과 같은 발효 조건을 만나지 않았다면 치즈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치즈는 다시 치즈 과자라든가 치즈 피자, 치즈 햄버거를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치즈는 우유와 유산균의 화합에서 나온 결과이지만 다시 치즈 햄버거의 원인이 된다. 치즈를 예로 들어보았으나,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본다. 어떤 사물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이 서로 관계를 맺고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물의 이러한 관계를 ‘상의상관(相依相關)의 법칙’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끊임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 인연화합의 법칙, 상의상관의 법칙을 통틀어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생겨 나려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 어울려야 생기고, 또한 어떤 것이 사라지는 것도 결국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야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연기의 이치를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홀로 독립된 영원한 것은 없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만물은 서로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생겨나고, 잠시 머물다가는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떤 물질이나 현상도 적절한 환경에 나타났다가 다시 그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서 물질이나 현상도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이 연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은 곧 우주의 모든 현상이 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한 톨의 쌀알이 어떻게 나왔는지 그 예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 톨의 쌀알 속에는 농부들이 흘린 노력의 땀이 서려 있는가 하면, 여름날의 햇빛과 바람이 담겨 있고 천둥과 먹구름과 빗방울이 들어 있다. 온 우주가 힘을 기울여야 쌀 한 톨이 여무는 것으로 본다. 나는 우주가 들어 있는 쌀을 먹고 산다. 나는 바로 온 우주와 둘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사물을 사랑하게 된다. 이 끝없는 사랑을 자비라고 한다. 자비는 바로 불교의 인간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윤리가 되는 것이다.
불교의 목표인 ‘성불’(成佛), 곧 인격의 완성도 사실은 나와 이웃이 마치 손과 발이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붓다는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것이며, 나를 보려면 연기를 보아야 한다.”라고 가르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4. 불교적 구원에 이르는 길
모든 존재는 어떤 성질을 지녔으며 그것들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는가 살펴보았다. 실로 붓다의 연기법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존재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붓다가 베나레스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들에게 가르친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해야 열반에 이르고 어떻게 살아야 구원될 수 있는지 함께 그 길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자신을 유지하려고 온갖 힘을 들이고 있으니 그것을 고(苦)라고 한다. 꽃이 피고, 아기가 배고파 울고, 무엇을 얻으려 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슬퍼하고, 폭풍이 불고, 물이 흐르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존재들이 힘들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니 아무리 개체들이 자신을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더라도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이렇게 힘들이는 모든 존재는 마치 병이 든 것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 고(苦)를 ‘괴로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감정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고(苦)의 상태에 있는가? 존재하려고 힘들이는 것은 갈애(渴愛)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 갈애로부터 번뇌가 생긴다고 본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붓다는 인간에게 발생하는 고(苦)의 발생 원인을 열 두 가지 인과의 고리로 보았다. 이것을 12연기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 욕망, 질병, 충동, 노쇠, 죽음 등은 하나의 현상이다. 이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모든 것이 커다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또한 생성 소멸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고(苦)도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붓다는 이 원인과 조건을 ‘12가지의 연결된 조건의 고리’로 살펴보았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 12연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사람이 태어나지[生] 않는다면 괴로움도 노쇠함도 죽음도[老死] 없겠지만, 태어나려는 의지[有]가 있다면 사람은 피할 수 없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물질적, 심적인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取]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집착하는 아집은 무엇에서 생긴 것인가? 이 집착은 대상에 대한 갈애[愛]로부터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갈애는 왜 생기는가? 갈애는 인간의 감각적 경험[受]에서 온다는 것이다. 만약에 감각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갈애할 대상도 없을 것이다. 이 감각적인 경험이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감각적 경험이란 감각 기관과 대상이 접촉[觸]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한다. 물론 감각 기관과 대상의 접촉이 없다면 감각 경험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감각 기관과 대상의 접촉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접촉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處]으로 비롯된다고 한다.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은 태내의 원초적인 의식에서 비롯된 심적, 육체적 유기체[名色]에 의존한다고 본다. 이 최초의 의식[識]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이 원초적 의식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이루어진 업(業)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을 행(行)이라고 부른다. 이 업(業)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업은 바로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지란 지적인 의미보다는 세계의 실상에 대하여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무상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아라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로 말미암아 인간 생사의 괴로운 존재 방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지, 무명을 없애야만 가능한 것이다. 붓다의 12연기설은 인간의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를 밝힌 것으로서,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죽음이 연기한 것이라고 보여 주고 있다. 불교는 깨달은 자가 깨달으려고 하는 자를 깨닫게 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내용이 12연기에 들어 있다. 결국 무지는 고(苦)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 무지로부터 비롯된 연기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열반이라고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理想)이요, 구원이다.
붓다는 무명을 타파하고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켜 열반에 이른 존재이다. 열반은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해탈이라고도 부른다. 욕망과 화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을 성취하면 인간의 생존도 함께 소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죽음과 동일시하는 견해는 열반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서 “나는 심지를 끌어내린다. 불길이 꺼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구제이다.”라는 말씀은, 열반이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죽은 뒤에 기대되는 낙원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완전한 인식과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지혜를 갖고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열반에 이른 사람은 세속의 일상사로부터 벗어나 현실 생활과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열반에 이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 길은 붓다 자신이 발견하여 걸어갔던 길로서 ‘여덟 가지 거룩한 길’[八正道]이다. 팔정도는 깨달음 이후 붓다의 삶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이루려는 사람이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은 비밀스러운 길이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그리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그 누구나 갈 수 있는 보편적 중도(中道)의 길이다.
첫째, 정견(正見, samyak-drsti)을 들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참 모습을 알려면 붓다의 연기의 진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정사(正思, samyak-sa kalpa)이다.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붓다의 깨달음의 진리를 통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그 진리로 항상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붓다의 법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쏠리는 것을 정사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연인이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듯이, 마음이 오로지 진리를 향해 쏠리고, 늘 진리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란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것이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열정이 자신을 온전히 채운다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정어(正語, samyak-v c)이다. 두 번째 정사(正思)에서 붓다의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결국 그 생각은 말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인간의 내적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온화하고 평온한 언어로 말씀하셨다. 언어는 곧 진리의 강을 건너게 하는 배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말로써 깨달음으로 다가간다. 가장 훌륭한 말씀은 괴로움을 소멸하고 평화로움을 가져오게 한다. 늘 진리를 향해 생각하면[正思] 진리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머리 속에 돈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자율과 부동산 시세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진리에 대한 생각에 내 생각이 쏠려 있다면 나는 진리의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진리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점점 열반으로 다가서는 것을 말한다.
넷째,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이다.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의 올바른 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을 정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업을 ‘살생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등의 계율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정업은 붓다의 진리 안에서 깨어 있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행위 하나 하나가 진리를 향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위대한 진리를 품고 이루어지는 행위야말로 위대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행위는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업으로 남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정명(正命, samyak- j va)이다. 진리에 비추어 이루어진 올바른 행위는 당연히 바른 생활을 하게 되며, 바른 직업을 통해서 바른 의식주를 영위하게 된다. 앞의 정업이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가 강조된 행위라고 한다면 정명은 사회 지향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섞여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다. 각자의 생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루에 모자를 백 개 만드는 사람이 그가 만든 모자를 자신이 모두 쓰고 다니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쓰고 다닌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 생활 속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사는 것을 정명이라고 한다.
여섯째, 정정진(正精進, samyak-vy
y ma)이다. 병이 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한번 먹고 낫기 어려운 법이다. 병을 완치하려면 계속 약을 잘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에 이르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여기서 올바른 노력, 곧 정정진은 자신의 해탈 뿐만 아니라 곧 이웃과 사회를 위한 노력과 관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해탈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항상 깊은 관심을 지니고, 그에 맞는 실천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론도 지식도 아니다. 종교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앞에 언급한 다섯 가지의 연결 고리가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본다. 바로 정정진은 쉬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일곱째, 정념(正念, samyak-sm ti)이다. 바른 기억이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실천이 항상 현재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한다. 종교적 실천은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뒤로 미루고 주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여덟째, 정정(正定, samyak-sam
dhi)이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음을 의미하는 올바른 삼매(三昧)이다. 바른 삼매는 진리와 일치된 삶을 뜻하는 것이다. 열반은 살아 있는 동안 여기서 얻는 것이고 진리의 체현된 모습을 말한다. 곧 진리의 체현을 통한 무한한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팔정도는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실천 덕목이기보다는 진리 체현의 길로서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팔정도를 통한 구원은 나와 세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인격을 완성하여 ‘깨달은 자’, 곧 붓다가 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각을 통한 인격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신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란 말보다는 해탈이나 열반이란 말을 사용한다.
5. 맺는 말
붓다는 생명이 있는 유기체처럼 모든 존재의 서로 뗄 수 없는 불이(不二)의 관계를 연기의 가르침으로 일깨워 주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하고 그 존재들을 향한 사랑이 자비라고 하였다. 따라서 생명체에 대한 불살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무생명에도 불성이 있으니 산천 초목이라도 붓다를 대하듯이 공경하고 보호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불교의 연기법은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부르는데, 중생의 개념이 초기 경전에서는 유정(有情) 곧 생명체를 의미하다가 대승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생명이 없는 무정(無情), 곧 무생명체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붓다의 성품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란 말은 붓다로 성불할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다시 생명체에서 모든 무생명체로 확대되어 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불교의 생태관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모든 중생이 하나이고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생태 윤리관을 「범망경」에 “모든 흙과 물은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통찰은 세계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곧 불교의 생태 윤리관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 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 뿐만 아니라 돌, 물, 흙에게도 미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비의 생태 윤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 공생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야 할 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불교적 구원은 인간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서로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는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곧 생물과 무생물까지 사랑하는 인간을 말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