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호 2002년 봄 선교
논단 2 |
유교와 구원론
금장태 교수 |
1. 유교에서 구원론의 과제
유교에서 ‘구원’(救援)이란 말은 위기나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도와서 그 위기나 곤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준다는
지극히 일상적 의미로만 쓰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를 근원적으로 죄악이나 멸망으로부터 끌어내어 온전하고
충족된 상태로 이끌어 준다는 종교적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교에서도 인간 존재는 항상 타락과 파탄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인간이 삶의 근원적 위기를 벗어나 충족된 삶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가는
데 깊은 관심을 지녀왔다. 이러한 관심을 유교의 구원론이라고 한다면, 이 구원론은 바깥에서 초월적 존재의 도움을 받는
것을 중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천 방법을 중시하는 것이다. 물론 유교에서도
‘하늘이 돕고 신이 돕는다’(天佑神助)는 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과 신의 도움을 빌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늘과 신의 도움이 따르게 되는 것이라 본다.
유교의 구원론은 대략 네 가지로 점검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천명(天命)을 받들고 따름으로써 마음을 편안히 하여 천명을
받아들이는 ‘순명’(順命)의 과제로서, 초월적 궁극 존재와 인간이 마주하여 일치를 확인함으로써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는 죽음과 삶의 단절을 넘어서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사생’(死生)의 과제로서, 죽음을 삶 속에 포용하여 죽음을
넘어섬으로써 구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는 인륜(人倫)의 도리를 밝혀 광명 정대하게 행하는 ‘수도’(修道)의 과제로서,
일상 생활 속에서 질서를 확보하고 인륜(人倫)의 품격을 확보함으로써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인간이 스스로
찾아가고 지켜 가는 노력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요, 이미 주어진 하늘의 뜻과 도리가
상응하여 인간을 혼란과 죄악과 분열로부터 끌어내는 힘이 되어, 조화와 질서 속에 충만한 삶의 구원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라
하겠다.
2. 순명(順命), 천명(天命)을 따르는 구원
유교에서 하늘[天, 上帝]은 만물의 존재 근거로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조화’(造化) 활동을 하며, 동시에 인간과 만물에
대해 명령하고 지배하는 ‘주재’(主宰)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공자는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라고 하여,
상벌을 주관하는 최고의 주재자로 하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나아가 공자는 “하늘이 미워할 것이다”라고 하거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라고 탄식하여, 하늘이 감정과 의지를 지닌 인격적 주재자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 전통에서
하늘은 인격적 주재자인 동시에 보편적 근원이요 필연적 이치로 제시되기도 한다.
유교인은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생명을 풍성하게 축복하기도 하고, 인간의 악을 미워하여 분노하고 재앙을
내리기도 하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유교인은 하늘을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재자로 이해하면서, 하늘의 명령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인간이 하늘의 명령을 알아차리며 받들 때에 비로소 유교적 인격의 올바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
본다. 공자는 “하늘의 명령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하고, 또한 군자로서 두려워해야 할 세 가지 가운데
첫째로서 “천명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하여, 군자로서 균형 잡힌 인격을 이루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천명을 알고
두려워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천명을 알고 두려워함으로써 군자의 인격을 성취한다는 것은 유교인에게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인격을 확보하는 길이다. 여기서 군자의 인격을 확보한다는 것은 유교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얻는 것이요,
자신의 인간적 가치가 온전하게 충족되는 구원의 실현을 의미한다.
천명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되고 있다. 따라서 천명을 안다는 조건은 세속적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소인의 차원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실현해야 할 근원적 가치 기준으로 천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인간
존재가 짐승으로 추락하는 길에서 벗어나 천명을 따라 참된 인격의 실현으로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맹자는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보존되고 하늘에 거슬리는 자는 멸망한다”라고 하여, 보존과 멸망이 갈라지는 계기가
하늘을 따르는가 거스르는가에 있음을 밝혀 준다. 그만큼 인간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들여 공손하게 받들고 따라야 하는
순천(順天)의 태도가 구원의 조건임을 밝혀 주고 있다.
유교에서 인간과 하늘의 만남은 하늘의 명령을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도 자신의 뜻을 하늘에 알리고
어려운 일을 하늘에 호소하기도 한다. 「서경」(泰誓)에서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 보시고, 하늘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라고 하여, 하늘이 인간의 호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하늘을 부모로 일컬으며 공경하고〔敬天〕, 두려워하며〔畏天〕, 받들고〔奉天〕, 섬기며〔事天〕, 제사 드림〔祭天〕으로써 존숭하고 있지만, 하늘도 백성을 사랑하여 긍휼히 여기며, 백성을 돕기 위해 임금을 세워 주고 스승을
세워 길러 주고 가르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교 전통에서는 인간이 천명(天命)을 받기 위하여 하늘과 마주한다는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주희(朱熹)는
「경재잠」(敬齋箴)에서 “의관을 반듯하게 하고, 우러르는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침잠하여 머물러서, 상제를 마주
대한다.”라고 하여, 상제와 얼굴을 마주하듯 가까이서 바라보는 생생한 경험을 강조한다. 그만큼 상제를 마주하여 그 명령을
생생하게 듣고 받들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명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도 “50세에 천명을 알았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50세 이전에는 천명을 알 수 없으니 천명과 떠나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명을 알고 받들어 가는 과정은 오랜 노력의 과정을 거쳐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원숙하게 천명을 알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면 천명을 알아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근거와 방법은 무엇인가? 「중용」에서는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품이라
한다”라고 하여, 초월적 하늘의 천명이 인간의 성품에 내재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천명과 성품을 일치시킴으로써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가능한 근거를 확인하는 것이요, 인간이 천명을 알고 받들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이미 인간
내면에 주어져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이 ‘천명’이라면, 인간이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들여 하늘을 지향할 수 있는 기반을 성품의 ‘덕’(德)이라 볼 수 있다. 천명이 성품의 ‘덕’에만 비춰지는 빛이라면,
성품의 ‘덕’은 천명을 받아 이를 간직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바탕인 것이다. 공자가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라고 말한 것은 하늘이 인간 내면의 ‘덕’(도덕적 인격성) 속에 내재하여 성품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옛
성왕(聖王)이 천명을 받게 된 것은 그 덕을 이루었기 때문임을 확인하여, “다 같이 순일한 덕이 있어서 하늘의 마음을 받들
수 있었으니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았다.”(「서경」, 咸有一德) 하고, 또한 “하늘은 친함이 없으니 오직 덕이 있는 자를
돕는다.”(「서경」, 蔡仲之命)라고 하여, 하늘이 인간을 돕는 것은 사사롭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덕을 이룬 경우에만
하늘의 도움이 내려지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교에서는 천명을 받고 하늘의 도움〔天佑〕을 받아 구원을 얻는
방법은 자신의 덕을 연마하는 데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또한 맹자는 “마음을 다하는 자는 성품을 알고 성품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을 발휘하여 성품을 아는 것은 하늘 곧 천명을 알 수 있는 통로이며, 안으로
마음과 성품을 간직하고 기르는[存心, 養性] 수양이 바로 초월적 하늘을 섬기고 천명을 받드는 방법임을 제기한 것이다.
하늘은 인간의 마음에 빛이 비치듯 명령을 내리며 인간은 마음을 비우고 덕을 닦아서 하늘과 일치하는 것이 바로 유교에서
구원을 획득하는 기본 방법이다. 이항로(華西 李恒老)는 하늘에 짝이 되는 인간의 마음을 태양에 짝이 되는 달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 하늘에서 빛이 비추듯 인간에게 드리워진 것이 천명이요, 인간에게서 빛이 반사되듯 하늘로 지향된 것이
‘덕’이라 볼 수 있다. 천명은 ‘덕’에만 비춰지는 것이요, 또한 ‘덕’만이 천명을 받고 이를 지킬 수 있는 인간의
바탕이다.
유교에서 인간이 ‘천’을 만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극한 정성[誠]과 공경[敬]을 강조한다. 정성(성실)은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그 성실함은 하늘의 본질이기도 하다. 믿음이 인간 관계에서 결합을 이루듯이 인간이 천명을 받아
하늘과 일치하는 길은 지극한 정성〔誠〕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성품 속에 천명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천명을 공경하여 받들고 정성스럽게 따름으로써 하늘과 일치시켜 가는 것이 바로 ‘천인합일’의 실현이요, 유교적 구원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성실은 하늘의 길이며, 성실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라고 하여, 인간의
도리〔人道〕는 하늘의 도리〔天道〕를 따라 실현함으로써 하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됨을 보여 준다. 여기서
정명도〔程明道〕는 “성실은 하늘의 도이고 공경은 사람 도리[人事]의 근본이니, 공경이 곧 성실이다”라고 하여,
인사〔人事〕로서 공경[敬]을 통해 천도〔天道]로서 성실[誠]과 일치시킴으로써 천인합일을 이루는 구원의 방법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성실(정성)의 실현으로 인간이 하늘과 일치를 이룬 인격을 ‘성인’(聖人)이라 한다.
이와 같이 유교에서 인간이 하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극한 정성[誠]과 공경[敬]이다. 유교인이 구원을 얻는
기본 방법은 바로 한 동작, 한 생각에서도 공경과 정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하늘과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공경은 인간의
마음을 집중시켜 자각 상태에서 천-상제를 지향하는 신앙적 태도라고 한다면, 정성(성실)은 천-상제와 일치를 유지하며
실현하는 신비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3. 사생(死生), 사(死)와 생(生)이 함께하는 구원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고, 죽음으로써 인간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은 인간을 불안과 두려움과 공허감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죽은 다음에 인간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떤 세계에서 존재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공자는 제자인 계로(季路)가 죽음에 관해 물었을 때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관해 알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를 회의주의자라 의심하기도 하고 현세주의자라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자는 이 말에서 죽음의 세계로 접근하고 이해하는 길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요,
죽음과 삶을 마주하는 유교적 인간의 자세를 제시한 것이다. 죽음의 의미란 삶의 태도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죽음은 인간으로서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 과정이다. 죽음을 극진하게 슬퍼하지만, 죽음을 허무한 것으로 부정하고 삶에
집착하는 것이 유교의 입장은 아니다. 「주역」에서는 “시작에 근원하고 끝으로 돌아가니 죽음과 삶의 설명을 알겠다”라고
하여, 죽음과 삶이 시작과 끝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순환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인간의 죽음이란 마치 하늘로 피어오른
연기가 점점 흩어져 대기 속으로 녹아들듯이, 개별적 생명이 우주의 전체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요, 인간 생명의 태어남이란
우주 전체로부터 작은 개체가 분리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죽음은 개체의 소멸일 수 있지만 우주적
생명으로 복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결코 허무한 소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사후 존재가 개체성을 버리고 전체
속에 녹아들어 간다는 것은 개체의 지속을 통해 그 개체의 구원을 얻는 방법을 찾기 어렵게 된다는 난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유교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도 사후에 개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확보하는 방법이 제시되며, 이러한 사후의 개체성을
확보함으로써 유교에서도 사후에 개체의 존재를 충족시켜 주고 구원을 실현해 주는 장치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교에서 사후의 개체 존재가 유지되는 방법은 두 가지 양상으로 제시된다. 그 하나는 개인의 사후 존재가
‘혼백’(魂魄)의 형태로 일정한 기간 동안 개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인의 사후에도 그 후손을 통해서
개체성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먼저 사후에도 유지되는 개체의 존재로서 ‘혼백’은 사후 존재의 영역에 속하지만
살아 있는 존재와 똑같이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살아 있는 사람의 집을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자의 집인 무덤을
‘음택’(陰宅)이라 하여, 존재 양상은 음과 양으로 구별되지만 ‘집’이라는 실상에서는 같은 것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
‘심신’(心身)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죽은 자도 ‘혼백’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의
특징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있으며, 사후의 존재도 살아 있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충족된 생명을 확보하여 구원을 얻는 데 있다.
유교적 전통에서는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면서, “지하에 돌아가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고 하는 말을 쉽사리 듣게 된다.
모든 사람은 죽으면 다시 조상을 만날 수 있고 조상과 후손이 죽은 뒤에도 가족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합장(合葬)하거나 자손을 부모의 무덤 근처에 잇달아 묻는 가족 묘지를 선호하는 사실은 죽은
자들의 공동 생활이 지속된다는 의식을 보여 준다.
이와 더불어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후손과 교류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교 전통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교류
방법은 집집마다 사당(祠堂), 곧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을 받드는 사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한 가정에서는 한 사람이
출입을 할 때나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에는 마치 자식들이 살아 있는 부모에게 알리듯이 사당에 가서 돌아가신
조상에게 고한다. 철따라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사당에 계신 조상에게 바치며, 사당에서 성대한 제물을 차려놓고
조상들에게 경건하게 제사를 드리면 조상의 신령이 후손의 정성에 흠향하고 그 음식에 복을 내려 준다[降福]고 믿으며,
자손들은 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 의례에 참여한다. 사당을 그 집안의 담장 안에 세우니, 같은 울타리 안에 죽은
조상과 살아 있는 후손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잊혀지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의 따뜻한
사랑의 공경심으로 받들어진다는 사실은 바로 유교인에게 사후 세계가 허무한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충만된 구원의 세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조상은 후손과 함께 살아 가며 음덕(陰德)을 베풀어 후손을 돕고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죽은
자에게 보람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자에 대한 공경과 산 자에 대한 축복이 교환되는 가운데 죽음과 삶의 세계가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유교인이 바로 사후 세계에서 구원을 얻는 길이다.
다음으로 한 개인은 그 후손을 통해 사후에도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의 개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나의 몸과
터럭과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킬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나의 몸이 나의 것이기에 앞서 부모의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면서 부모의 뜻을 계승하고 부모의 사업을 이루어 가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는 사실도 부모의 존재가 자식을 통해 이어져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교적 생명 의식 속에서 한 개인이란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 이어가는 사슬의 한 고리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고리는 하나의 완결된 존재이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긴 사슬을 이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역」에서는 “착한 일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움이 남을 것이요, 악한 일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서 경사나 재앙이 나 자신에게 주어질 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유교 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의 행위에 대하여 연대 책임을 지고 상벌을 받기도 하며, 부모도
자식의 행위에 대하여 연대 책임을 지고 상벌을 받기도 하는 사실은 바로 부모의 생명이 자식에게로 이어져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모가 나라에 큰 공을 이루면 그 자손에게도 음직(陰職)의 벼슬이 내려지며, 자손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죽은 조상에게도 증직(贈職)으로 벼슬을 높여 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또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연좌법’(連坐法)으로 처벌이 적용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생명 의식에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이 자손의 개체 속에 유지된다는 인식은 유교인에게 사후에도 자손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며, 조상에 대해서도 의무를
지게 한다. 따라서 자신의 개체 존재가 후손으로 이어져 존재한다는 생명 의식은 유교인에게 후손의 삶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다.
유교에서 사후 존재는 비록 지극히 복된 천상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은 채
후손과 함께 살아 가며 후손을 통해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충족된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죽음은 삶과 단절되지 않고 삶과 더불어 존속하며, 삶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삶 속에 죽음을
감싸고, 삶과 죽음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한 개체의 사후 세계를 죽음의 공허함과 소멸로부터 구원해 주는 존재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4. 수도(修道), 인륜(人倫)의 도리(道理)를 밝히는 구원
유교는 하늘을 말하고 죽음을 말하더라도 언제나 초월성을 강조하기에 앞서 내재성과 현실성에서 출발하는 자세를 보여
준다. 따라서 유교의 구원 의식은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의 일상적 삶을 통하여 추구하고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니, 자신을 닦아서 기다리는 것이 천명을 수립하는 방법이다”라고
하여, 삶과 죽음의 차별을 넘어서 자신의 인격을 닦는 ‘수신’(修身)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천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라
제시하였다. 또한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하여, ‘문도’(聞道) 곧 ‘도’를
깨달음으로써 죽음과 삶의 차별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수신’이나 ‘문도’는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온전한
가치의 실현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람됨의 근거를 ‘인’(仁)이라 가르쳤으니, ‘인’을 실현하는 것은 바로 인격의 기준으로서 ‘덕’(德)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요, ‘도’(道)를 닦아서 따르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을 죽여서 인(仁)을 이룬다” 하고, 맹자는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의(義)를 취한다”라고 하여, ‘인’(仁)이나 ‘의’(義)의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버려
죽음을 택할 수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생명을 버려서라도 ‘인’과 ‘의’의 가치를 얻을 때에 바로 삶과 죽음을 넘어서
참된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현실 세계 속에서 추구하는 유교적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유교의 인간적 가치는 인간의 도덕성이요, 그 도덕 규범은 바로 유교적 가르침의 핵심을 이루는 인간 관계의 규범이요
인륜(人倫)이다. 「중용」에서 천명이 인간의 내면에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이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이 ‘도’를 닦는 것은 ‘교’(敎)라 하였다. 여기서 ‘교’는 인륜의 도덕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요, 인간으로서 마땅히
따라가야 할 ‘도’를 닦는 것이며, 인간의 타고난 근원적 가치인 ‘성’을 따르는 것이요, 하늘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다.
정약용은 “인(仁)이란 두 사람[二人]이다”(「大學公議」)라고 하여, 인간의 기본적 도덕성으로서 ‘인’을 두 사람의
관계로 해석하였다. ‘인’(仁)은 한 인간을 중심으로 윗사람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아랫사람과의 관계라는 상하 좌우의
모든 인간 관계를 의미하며, 여기서 윗사람과의 관계가 ‘효’(孝)요, 아랫사람과의 관계는 ‘자’(慈)요, 이웃 사이의
수평적 관계는 ‘제’(弟)로 제시된다. 공자도 “효도와 우애는 인(仁)을 실현하는 근본이다”라고 언급하여, 인간다운 삶의
근본은 가족적인 도덕 규범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인’의 인간적 도덕성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자애롭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효, 제, 자’(孝弟慈)의 가족적 상호 관계의 규범에서 출발하여 상하 좌우
모든 방향의 인간 관계로 확장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관계의 기본 형식은 가족 관계에서 확인될 수 있고,
‘인륜’의 일반적 규범 질서는 바로 ‘효, 제, 자’의 가족적 규범 질서에서 배양되어 뻗어 나오고 가족적 규범 질서가
확산되면서 성립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유교는 ‘인’이나 ‘효, 제, 자’라는 인간 관계의 도덕 규범을 통해 가까이
부모, 형제, 자녀, 가족으로부터 이웃, 인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관계의 만남에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 관계의 조화와 일치라는 규범적 질서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유교인이 확보할 수 있는
구원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규범들도 인간 사이에 억압적 권위를 확보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결합을 두터이 하는 도덕적 질서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서 유교적 구원의 세계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도덕성의 근원은 하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성품으로 부여해 준 것이지만, 인간이 이 세계 속에서 천명으로 받은 도덕성을
실현하는 방법은 먼저 가족 관계의 유대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교적 도덕 실천의 기본 방법이다. 곧 부모, 형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
만물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도덕 규범의 실천 방법은 자신의 내면적 성품에 뿌리를 두고 출발하지만
가정을 통해서 사회로 점점 확산되어 가는 확장 체계라 할 수 있다.
유교적 전통 사회는 친족 질서를 중요시하여 ‘대가족’ 집단을 이루고 있지만, 그 가족 관계의 중심에는 실제로 자기
자신이 놓여 있다. 이이(栗谷 李珥)는 “천하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나 자신이요, 나 자신이 가장 귀중하기 때문에 부모가
귀중하다.”(「擊蒙要訣」)라고 언급하여,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야 자기의 소중한 생명을 낳아 준
부모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교의 가족적 도덕 규범으로서 ‘효도’는 그 출발점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유교에서 가정의 뿌리는 가족의 구성원인 개인이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고 한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도 개인의 ‘수신’, 곧 ‘수도’에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은 자기 인격의 수양[修身]을 근본으로 하여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齊家], 나라를 다스리며[治國],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것[平天下]으로 확산시켜 가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온 천하가 화평한 질서를 이룬다는
현실 세계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출발점은 바로 개인의 인격 수양으로서 ‘수도’(수신)에 있는 것이요, 그 ‘수도’의
방법은 먼저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 배양하여 확산시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은 유교적 도덕
질서의 묘포(苗圃)이며, 구원의 실현을 위한 ‘수도’의 도장(道場)이다. 유교인에게 가정은 바로 지성소(至聖所)요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것이요, 작은 냇물이 큰 강물로 흘러가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가족적 도덕 규범이 바로 사회 전반의 규범 질서로
확장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가정의 확장은 ‘국가’(國家)라는 명칭에서처럼 나라도 하나의 가족적 질서로
이해하여, 임금을 아버지(君父)라 하고 왕후를 어머니(國母)라 일컫는다. 나아가 장재(橫渠 張載)는 「서명」(西銘)에서
가정을 극한까지 확장하여 우주(天地)를 하나의 가정으로 보아, “하늘을 아버지라 하고, 땅을 어머니라 한다” 하며, 임금을
하늘과 땅의 맏아들[宗子]로 일컬어 우주일가(宇宙一家) 의식을 확인할 수도 있다.
유교의 가족 구조에서는 부모와 자식의[父子] 관계를 가장 중시하지만, 그 가족 구조의 근본에는 ‘부자’에 앞서서
‘부부’가 존재함을 강조한다. 가정의례[家禮]에서도 혼례를 ‘인륜의 대사’라 하여, 혼례가 바로 잡히지 않고 부부의
윤리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부자의 윤리, 가족의 윤리, 나아가 사회의 윤리가 모두 무너지고 만다는 인식을 제시한다. 이처럼
남녀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혼인이 가족을 구성하는 주춧돌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사실은 가장 일상적 인간 관계의
규범이 인간 사회의 전체적 질서를 이루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힘으로써, 인간 관계의 화합과 질서를
튼튼하고 확고하게 수립하여 구원의 세계를 확보하는 데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유교는 일상 생활을 떠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도 가정에서 실천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정을 통하여 자신을 형성하고 사회로 나갈 수 있으며, 국가와 우주도 확장된 가족 관계로 이해함으로써, 가정
중심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가족은 유교적인 도덕 규범과 사회 제도 등 모든 영역에서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유교 이념은
한편으로 개인적 수신(修身)을 중시하며, 개인이 모든 문제의 근본임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 전체적 공(公)의
규범이 강조되고 따라서 개인이나 가족의 사(私)적 세계를 넘어서 사회 전체적 공(公)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교적 가정 개념의 핵심은 개인을 가족으로 결합시키고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기초요 발판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교 사회의 전통적 가정은 가족주의에 사로잡히는 폐쇄화의 폐단을 극복하고, 개인의 내면적 도덕성에
뿌리를 두면서 가정을 넘어 사회 전체의 질서 있는 세계로 확장시켜 가는 ‘수도’의 길을 실천함으로써 유교적 의미의
구원도 가능할 것이다.
5. 유교 구원론의 성격
유교인은 천명을 받들고 따름으로써 하늘과 일치하기를 추구한다. 그 방법은 항상 안으로 찾아가는, 자신의 마음 속에
주어진 천명인 성품을 찾아가는 수양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천명을 성품 속에 간직하고 있지만, 이 성품을 발견하고
탐욕으로 어지럽혀진 상태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하며 이를 배양하여 실현하는 수양의 실천이 요구된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인격의 올바른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바로 근원적으로 천명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죽음과 삶을 서로 의지하고 조화롭게 병행시키는 ‘사당’의 의례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유교인은 죽음의 공포와 허무
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삶과 죽음이 서로 포용되는 사생관을 통해 사후 세계에서 구원의 길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유교는 현실 세계에서 모든 인간 관계를 두텁게 맺어 주고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게 함으로써 개체가 전체
속에서 안심하고 충족한 삶을 누리는 것을 구원의 모습으로 확인한다. 가족과 이웃과 온 세상이 인륜의 도덕적 규범을
실현하여 조화롭고 화평한 질서를 이루는 것은 현실의 일상 속에서 천명에 순응하여 즐겨 따르는 ‘낙천명’(樂天命)의
삶이요, 유교적 구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유교에서 구원을 위한 방법으로는 수양 공부의 실천이 중시되며, 이 수양 공부는 시작부터 끝까지 ‘경’(敬)의 공경하고
경건한 자세를 지켜갈 것을 강조한다. 경건함은 겉으로 욕망에 이끌려 해이되기 쉬운 자신의 몸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을
엄숙하게 하는[整齊嚴肅] 것이요,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해이되지 않게 하는’[主一無適] 것이며, 언제나
각성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惺惺法]이다. 유교인은 일상 생활에서 항상 나태하거나 방탕함을 이기고 경건함으로
자신을 단속함으로써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늘을 마주하고 그 명령을 받들어, 천명을 일상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수도’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러한 ‘수도’의 길은 일상적 생활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지만 바로 유교적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통 사회의 선비들은 일상적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적 탐욕에 빠지지 않고 매우 엄격한 자기 수양을 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