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2호>논단3-그리스도교 구원론/심상태 신부

2002. 4. 9. 오후 12:19:45

글자

논단3

 

그리스도교와 구원론 - 심상태 신부

 

인간이 자기 존재의 유한성과 현실 세계의 소외 상태로부터 벗어나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종교를 신봉하는 한, 무릇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는 구원 종교의 성격을 지닌다. 수다한 종교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자연적 종교심에서가 아니라, 인간과 현실 세계의 외부에서 다가온 하느님의 계시에 입각하여 생겨난 초자연적 계시 종교라고 자처한다.1)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인류와 세계의 구원 진리와 상관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에게서 계시된 내용이 구원의 실재라고 믿으며 구원 종교임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신앙의 존폐가 걸린 결정적 문제이고,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진정성도 함께 걸려 있다.

‘구원’ 문제는 종교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다.2)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구원이나 완성을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일차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제공된 선물로 이해한다. 또한 이 신앙 진리의 보편성을 역사상 2000년 전 출현했던 나자렛 예수라는 한 사람의 유다인과 관련된 구체적 사건에 의거하여 주창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구체적 삶을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을 온 인류를 죄와 비구원의 처지에서 구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나자렛 예수를 통한 구원 교리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걸린 중심 진리인 것이다.

이하에서 그리스도교가 믿는 구원 실재의 실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행업, 죽음과 부활, 그리고 초기 제자들의 공동체로 나누어 구명하고 나서, 이제 시작된 제삼천년기를 맞아 종교 일반의 구원 과업에 관한 입장 천명으로 끝맺고자 한다.

 

1.  예수의 복음 선포와 행업 안에서 구원 실재

 

그리스도인들은 나자렛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믿으면서 그분의 인격적 현존과 행업을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구원 실재로 간주한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중심부에 바로 하느님 나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거기서 그분이 선포하고 실현하셨던 구원의 실상이 드러난다.3)1. 예수께서는 당시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구원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유다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마태 4,12-17; 루가 4,14-15).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며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 또한 하느님과 이웃, 온 우주와 나누는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룩하는 구원의 실재로서 다가온다.

예수께서는, 세상 종말에 올 메시아 구세주에 관해 언급하는 이사야서(61, 1 이하)의 예언이 당신을 두고 한 사실임을 천명하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또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오래 대망하던 ‘시간’이 그와 함께 ‘오늘’ 시작되고 있음을 밝히셨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예수께서 선포하신 구원은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통칭한다. 그들은 우선 죄인과 세리들과 창녀들이고(마르 2,6; 마태 11,19; 21,31-32; 루가 15,1; 18,11 참조), 단순한 사람들이며(마태 11,25 참조), 작은 이들이고(마르 9,42; 마태 10,42; 18,10.14; 25,40-45 참조), 목자와 의사, 의복 제조인, 이발사, 도살자와 같은 천역 종사자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현실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고통당하고 굶주리며, 목마르고 헐벗으며, 낯설고 병들었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울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아울러 지칭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실천하셨다.4) 당시 사회에서 부자와 빈자, 이웃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들 사이에는 사회적 구별과 차별이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에게 특별히 간택된 선민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선민 가운데에는 구원에 합당한 부류의 양민과 구원에서 배제된 부류의 죄인들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이스라엘인들은 소외된 처지 속에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양민이 경멸하고 경원시하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죄진 사람들을 가까이 대하시며 그들 운명에 동참하셨다.

질병 치유는 역사적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확실한 사실들이다(마르 1, 41-42; 루가 7,22; 11,20; 마태 11,5 참조). 그분이 질병을 치유하시는 기적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표징들이었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의 가지들이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징표라고 알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의 기적 행위를 본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루가 21,31 참조). 더욱이 예수의 치유 기적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표징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징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그분의 치유 기적들은 현실 세계에서 소외된 실재가 종말론적 구원 실재로 변형됨을 나타내는 상징들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다. 그분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사도 제자로 삼으셨으며(마르 2,13-17; 마태 9,9-12; 루가 5,27-32 참조), 또 다른 세리인 자캐오를 수락하시면서 그와 그의 가정이 구원되었다고 선언하셨다(루가 19, 1-10 참조). 불행한 과거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게서 전적으로 수락되는 체험을 한 뒤에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된다(루가 7,15; 마르 14,3-9; 마태 26,6-13; 요한 12,1-8; 루가 12,1-11 참조).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교인들도 기쁘게 대하시고 여인들이 일행에 합류토록 허용하셨으며,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도 함께 하셨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수락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실재가 그들에게 다가온 것을 체험하였고 그렇게 갈망하던 구원이 무상의 선물로 주어졌음을 믿게 되었다.

예수의 사죄(赦罪) 행위 역시 해방의 은총으로써 하느님 나라 도래의 상징으로 이해될 것이다. 죄의 용서는 예수께서 보여 주신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성과 치유 기적에서 구현되는 동일한 하느님 나라의 구원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들이란 그들 자신의 행위에 따라서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구원될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은총으로써 도래한다는 선포를 받아들인다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당시 사회적이고 종교적 현실 상황에서 구원의 희망이 전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게 사죄를 선포하셨다. 그들이 지닌 구원에 대한 희망은 기존 사회의 법규정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게서만 올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은총으로 도래하시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5)2. 예수께서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청되는 율법을 무효화하지 않고 높은 차원에서 완성시키고자 하셨다. 그분은 사회에서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율법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하셨다. 그분에게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죄과와 형벌, 공로와 보상의 법적 도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분은 경직된 법질서가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이 구원 차원에서 최종적 실재임을 선포하시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처지에서 생활하던 백성이 하느님 나라를 수용하고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될 것을 요청하셨다(루가 24,47; 사도 1,38; 5,31; 13,38 참조).

예수에게 죄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를 수용하기를 거절하고, 이 나라 실현에 부분적으로 기여하기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두 차원의 실재, 곧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실재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 존재의 마음에서 생겨난다.6) 모든 죄는 인간의 존재 구조에 상응해서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국면을 가지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죄의 인격적 성격을 강조하시면서 안식일에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행위처럼 육신을 사용함으로써 법률적 개념으로 법을 위반하는 것이 반드시 죄라고 간주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죄의 실재의 근원을 인간의 마음속에서 보셨다. 죄란 인간의 외적 행동으로 표출되기에 앞서 오래 전 마음속에 잠재한다고 보신 것이다. 죄의 본질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수락하기를 거절하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정당하다고 여기는 그들의 역사(役事)에 집중함으로써, 무상의 선물로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들이 행하는 선행이 구원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예수께서는 죄의 공적이고 사회적이며 구조적 차원을 질책하셨다. 그분은 이 현실 세계에 이미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를 거스르는 불의한 사회적 차원을 비판하신다. 죄의 사회적 차원은 사회 생활에서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를 거부하는 데에 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은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 안에 분명히 정초하고 있다. 죄는 더 이상 하느님을 직접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거스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란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까지도 단절하는 데에 성립한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하셨다.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실현하신 구원 실재로서 하느님 나라는 기존 현실 세계의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를 의미한다.7) 예수께서는 당시 구별되고 분리된 가운데 생활하던 유다인과 이교인,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성인(成人)과 유약자(幼弱者)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로 대하신 것이다. 이러한 처신은, 사람들 사이를 율법 규정에 따라 구별할 뿐만 아니라 분리시키고, 그 가운데에서 자신들은 특권을 누리는 기존 사회 질서의 지배자들 입장과 대치되는 하느님 나라의 대조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마태 23,8 이하;  마르 10,42-45 참조).

 

2.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구원 실재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실현하고자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유다교와 사회 지도자들에게서 배척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뒤에 부활하신다. 여기서 드러나는 구원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예수께서는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구원 실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온전하게 실현하려고 노력하셨다.8) 예수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그분의 온 생애와 행업과 상관이 있다. 그분의 설교와 행업들은 당시 유다교와 정치 당국과 마찰을 일으켰다. 유다교 종교회의는 그분을 하느님을 모독한 독성죄(瀆聖罪)로 단죄하였으며(마르 14,64 참조), 정치 당국자들은 그분을 정치적 선동자라는 죄명으로 국사범격의 십자가형에 처했다(마르 15,1-27 참조). 그분이 현실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사용하여 하느님 나라를 건립하려고 기도하시지는 않았으나 그분의 보편적 사랑은 당시의 사회 상황에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정치적 사랑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죄악의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적 정치적 억압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실적 소외 상황에서 은총의 질서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고 예수께서 걸으신 도정의 역사적 귀결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귀결을 회피하거나 직면해야 하는 선택의 길에서 후자를 택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당하시게 될 폭력적 죽음의 가능성을 고려하시면서도(마르 14,12.26; 요한 13,26-30 참조) 소명을 끝까지 지키시고자, 백성의 증오로 말미암아 가해진 폭력적 죽음을 하느님의 궁극적 의지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속에서 고통과 불의로 가득 찬 현실 세계의 인간들을 아낌없이 사랑하셨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그분의 죽음 수락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충실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분은 좌절과 죽음의 심연을 체험하시면서 인간 존재로서 끝까지 사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폭력적 죽음을 자유롭게 수락하심으로써 소외된 세계에서 구원의 실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구체적 양식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은 우리 인간 구원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9)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 이 새로운 인간 실존은 다른 인간들을 오로지 사랑하였지만 그를 증오함으로써 일어난 부조리한 상태와 직면할지라도 절대적 의미를 믿는 신앙의 실존을 드러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충실과 인간에 대한 봉사 속에서 고귀하기 그지없는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써 사랑이 죽음의 위협과 공포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십자가는 구조적 불의가 지배하는 이 역사적 세계 안에서 갈등과 충돌에 시달리는 해방 과정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으로써 해방이란 이 세계의 이웃 인간과 하느님의 일을 위한 순교와 희생을 거쳐야만 실현될 수 있을 뿐임을 제시한 것이다.

2.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사건이다.10)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예수 부활 신앙에 정초하고 있다. 부활 신앙은 십자가형에 처형당한 스승이 살아 계심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온 결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술 능력을 초월하는 스승의 발현으로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 발현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고 비참하게 처형되신 예수를 결코 하느님이신 주님으로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부활은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한 결정적 구원 사건이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진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사도 2,23-24; 3,13-15). 그분의 부활은 인간의 불의를 이기시는 하느님의 개선을 보여 준다. 예수의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은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으로서 하느님은 무력하게 나타나신다. 이 하느님의 무력(無力)은 인간 존재 속에 하느님의 절대적 임재(臨在),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끝까지 동참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 임재의 표현으로 이해될 것이다. 인간 존재 속에 하느님의 임재는 이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완료되었다. 십자가의 임재를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은 사랑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부활 없는 사랑은 진정한 권능이 아니며, 십자가 없는 권능은 사랑이 아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부활은, 이를테면 그분의 모든 실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분의 존재와 소명이 종말론적 양식으로 실현되고 충만하게 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유다 백성의 배척으로 하느님 나라는 보편적이고 우주적 차원에서 실현될 수 없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부활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분이 십자가 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취하신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확인시켰다. 곧, 죽음에까지 이르는 아가페적 사랑이 현실 세계에 지속되는 가치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예수의 삶이 구원으로 이끄는 ‘현묘한 길’로서 하느님에 의해 친히 확인되었음을 가리킨다.  예수 부활은 인간들이 열망하는 이상향이 이미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분의 부활과 함께 이 세계 안에서 인간 존재의 총체적 변형으로서 모든 소외 요소들의 극복이 한 사람의 인간 존재에게서 실현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 안에서 현 세계의 총체적 변형 실현의 가능성과 인간 존재의 영원한 삶으로의 변형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처럼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으로 보여질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들 중에서 처음으로 깨어나신 분이시다. 그분이 그분을 믿고 뒤따르는 제자들의 맏형이라고 지칭되기 때문에(로마 8,29 참조) 모든 인간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이웃을 위한 삶에 투신할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 때문에 실제로 죽어 가고 십자가에 처형되며, 살해당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문당하며 ‘실종된다’. 그리고 또한 수많은 인간들이 구조적 불의로 말미암아 서서히 십자가의 죽음에 처해진다. 이러한 현실 세계의 소외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 존재의 부활에 대한 희망일 수 있다.11) 이를테면, 그분의 부활은 자신의 운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삶은 곧 ‘구원된다’는 희망을 일깨운다.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끝없는 사랑의 삶이 구원의 실재로 드러난 것이다.

예수 부활은 구원된 세계의 시작을 뜻한다. 제자들은 이 사건의 단순한 관람자들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부활은 세계를 위한 구원의 약속을(구현하고 있는 약속) 실현하도록 작동시켜 준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으로써 부활의 씨앗이 인간의 실존 안에 심어짐을 믿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갈라 3,27).

 

3.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구원 실재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과 부활, 예루살렘에서 체험한 성령 강림을 통해서 현실 사회 질서와 대조적인 새로운 형제 자매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이 신앙 공동체, 곧 교회를 구원 실재로서 지상의 하느님 나라로 대하고 있다.12)1.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신앙 생활을 영위하였다(사도 1,2-2,13 참조). 그들은 성령 강림을 통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양식으로 하느님에게 사로잡히면서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13)제자들은 종말론적 성령의 은사가 특정 소수 사람들에게만 부여된 특전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체험하였다. 그리스도교, 곧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이 종말론적 성령 체험을 통해서 생겨났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민족이나 신분, 성과 연령의 차이 없이 새로운 공동체의 평등한 구성원들이 되었다. 자녀들도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노인들은 꿈을 꾸고 상전 뿐만 아니라 남종이나 여종들도 예언을 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던 것이다(사도 2, 14-46 참조).

이처럼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를 형상화한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는 다른 인간 사회 집단에서 통용되는 민족이나 신분, 성과 연령에 따른 구별 내지 차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바오로 서간에서 이점이 분명하게 진술된 바 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갈라 3, 27-28).

일반적으로 당시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지 않았던 새로운 인간 공동체로서 민족적, 사회적 장벽, 집단 이기주의, 신분의 차이, 성차별 등이 폐기된 특유한 공동체가 예수의 제자들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은 분리되고 분열된 처지에서 생활하던 상이한 민족과 집단들 사이에 맺어진 평화 조약의 역사(役事)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구원의 실재로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내면적 종교성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차원에서도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물론, 이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는 인간 개인의 내적 차원과도 관련된다.14) 가난하고 병들며 무지하기 때문에 율법을 올바로 지키지 못하고 죄인으로 생활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수락됨으로써 그를 노예화하는 우려와 공포, 이기주의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 몰아적 사랑으로 해방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개한 세리 자캐오나 불쌍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일어난 하느님 나라의 내적 차원을 대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율법주의를 대신하여 은총으로 가능하게 된 사회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형제와 자매들의 생활 공동체로 인간 사회를 분리시켜 온 전통적 세계 질서가 의문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가 초기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집단적 이기주의 생활 양식인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장벽이 철폐된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면서 진정한 형제애를 우선적으로 그들 가운데서 구현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 형제애 실현의 경계를 외부 세계까지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로서 신앙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람들의 새로운 관계가 지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는 특정 민족과 신분, 성과 연령에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에 개방되어 있다.15)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소외된 현실 세계가 결정적으로 변형되어 구원되도록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온 아가페적 사랑의 화신으로서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 실재로서 그리스도를 제자들의 주님일 뿐 아니라 온 우주와 인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 10).

온 인류의 일치 그리고 인류와 우주의 일치는 평화가 이룩된 세계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이 현실적으로 영위될 때에 실현된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가 나눔과 섬김을 생활하는 아가페에 입각하여 평화를 이룩할 때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이 완성 목표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원이 이룩된 상태로서 평화는 순전히 내적인 영혼의 평화나, 아니면 인간들 사이에 형식적으로 맺어진 외적 평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16) 여기서 말하는 평화, ‘샬롬’(Shalom)은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처럼 인간 존재의 내적이고 외적인 영역을 두루 포괄하는 실로 보편적 평화이다.17) 분리되고 분열된 인간들 사이에 화해를 이룩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내면 실재로서 영혼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이고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실재의 모든 차원의 화해를 지향한다.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평화가 온전한 형태로 이룩될 때에 인류 사회의 질서와 우주 만물의 질서가 회복되고 인류가 대망하는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4. 제삼천년기 종교 일반의 구원 과업

 

계시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구체적 역사 인물인 나자렛 예수의 온 생애, 죽음과 부활 등을 구원 실재로 믿고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인류 역사의 보편적 구원 요소의 평가 기준으로 간주한다. 이 구원관에 비추어 제삼천년기의 종교적 구원 과업에 관한 입장을 간략하게나마 표명하고자 한다.

1. 예수의 삶, 죽음과 부활에 정초한 그리스도교 구원관은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순전히 내세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고 현실 도피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 구원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온갖 유한성과 현실적 소외 상황으로부터 ‘여기서 지금’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교는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구원이 일차적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보편적 선물이라고 믿는다.18) 그러므로 인류 역사 시작부터 구원 실재로서 하느님 나라는 인종, 문화, 전통, 연령, 성 등의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인간 삶의 현장에서 제공된다고 믿는다.19) 하느님 나라의 부분적 실현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생하리라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비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20)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 활동은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상관없이 구원과 관련되는 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고 실현하신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구원 실재로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통찰로 인간의 모든 현세적 활동의 구원적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흔히 종교인들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 과학 활동 등과 같이 외견상 비종교적 활동들은 자체적으로 구원 성격을 지니기보다 현세적 의미를 지닐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 활동의 이원론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고 실현하신 하느님 나라 실재의 통합적 관점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소외된 현실 세계를 내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모든 영역의 활동을 구원적이라고 간주한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은 한결같이 현세적 가치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소외된 현실 상황을 최선을 다해서 변형시키려 노력하는 비종교적 활동을 포함한 모든 노력을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구원 행위로 평가할 것이다. 무릇 종교인들은 모두 자신의 종교적 활동의 사회, 경제, 정치적 함축성을 보며 비종교적 활동의 구원 의미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2.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현세 안에서 실현된 구원 실재라고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출현이 이루어지고 2000년의 세월이 경과한 오늘날 현실 세계에서도 여전히 온갖 불의와 부조리가 만연하고 있다. 제삼천년기 세계의 냉엄한 현실이 구원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를 당혹케 만든다.21)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계 기술이 생활의 모든 영역을 규정하는 시대 상황 안에 반생명적, 곧 비구원적 요소들이 넘쳐나고 있어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의 문화’로 지칭하기도 한다.22)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소유와 지배, ‘죽음의 질서’와 대조되는 나눔과 섬김을 생활화하는 ‘생명과 사랑의 질서’를 형성하는 가운데 완성될 구원 실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성사적 표징이 되려고 노력한다.23)그리스도교는,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정의 구현이나 생태계 보호 등 인류의 공동선 실현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그래서 제삼천년기 인류와 세계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고 사랑과 생명의 문화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선의의 모든 개인과 단체들, 특히 이웃 종교들과 연대적 협력을 적극적으로 도모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공동선 실현을 위하여 그리스도교 ‘밖에서’ 몰아적으로 투신하는 비그리스도인들과 비종교인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깊은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하느님 백성에 속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존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인류와 세계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성사적 표징이라고 자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와 세계 구원 실현을 위한 범인류적 연대 활동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솔선수범의 자세로 헌신적으로 투신해야 할 과업이 그리스도교에 부과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겸허한 자세로 나눔과 섬김을 살아감으로써 소외된 현실을 하느님 나라로 변형시키는 종말론적 구원 역사(役事)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이 역사적 과업을 신실하게 수행할 때에 2000여 년에 걸쳐 부단히 선포되어 온 구세주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가 제삼천년기 세계 안에서 신빙성 있게 현시될 것이다.

제삼천년기가 시작된 현 시점에서 지난 세기 후반기에 진행된 생태계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체세포 활용을 통한 복제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역사 시작 이래 지속되었던 생명 세계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도래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인류의 현 상황은 동서양 모든 종교에게 엄청난 도전이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관계자들은 제삼천년기 시대 상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과 도전들을 심각하게 대하면서 이에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 후반기부터 종교간 교류가 다양한 형태로 진척되었다. 하지만 이론상의 쟁론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인류의 공동선 실현을 위한 범세계적 협력은 아직 괄목할만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대 세계 안에서 불화를 조장하고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들 저변에는 종교간 갈등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모든 종교가 표방하는 구원론의 진정성은 제삼천년기의 시대적 도전에 직면하여 인류의 공동선과 세계 평화 실현에 진실로 기여하는가에 따라서 결정적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믿는다. ■

 

주(註)

 

1) 졸문, “칼 라너의 계시 이해”, 「한국 교회와 신학 - 전환기의 신앙 이해」, 바오로 딸, 1999년, 345-383면; 졸저, 「익명의 그리스도인 - 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 바오로 딸, 2001년 참조.

2) ‘구원’ 주제와 관련하여 이하 졸문에서 더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구원-전환기의 신앙 이해」, 성 바오로 출판사, 1981년; “그리스도 구원의 해방적 요소”, 「續·2000년대의 한국 교회」, 바오로 딸, 1997년, 135-165면; 이제민,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 「神學展望」 106 (1994/가을), 35-74면; 조욱현, “그리스도교의 구원관”, 「이성과 신앙」, 9 (1995.4), 15-57면; 임병헌, “그리스도교 구원관에 대한 숙고”, 「가톨릭 신학과 사상」 22 (1997/겨울), 76-98면 참조.

3) 졸문, “현대의 그리스도 이해”, 「그리스도와 구원」, 141-161면;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 「한국 교회와 신학」, 53-131면 여기서는 특히 55면 이하 참조.

4) 졸문, “그리스도 구원의 해방적 요소”, 141-151면;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론”, 「2000년대의 한국 교회」, 성 바오로 출판사 1993년, 160-167면 참조.

5) J. Sobrino, Christology at the Crossroads, Maryknoll, New York, 1978년, 49면 이하 참조.

6) 인간 존재의 인격적이고 사회적 차원에 관하여 졸저, 「인간.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년, 108-147면 참조.

7) 졸문,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 72-107면 참조.

8) 졸문, “현대의 그리스도 이해”, 157-159면; “그리스도와 구원”, 173면 이하; “그리스도 구원의 해방적 요소”, 151-155면 참조.

9) 이제민, 앞의 글, 58면 참조.

10) 졸문, “현대의 그리스도 이해”, 156-161면; “그리스도와 구원”, 174-176면; “예수 부활 - 구원 희망의 근거”, 「續·그리스도와 구원」, 성 바오로 출판사 1984년, 180-184면; “예수의 부활”, 「續·2000년대의 한국 교회」, 166-187면 참조.

11) 졸문: “신앙의 원리로서의 희망”, 「그리스도와 구원」, 93-118면; “희망의 지평 하에서의 인간”, 「續·그리스도와 구원」, 185-203면; 「인간. 신학적 인간학 입문」, 292-313면 참조.

12) 졸문,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 81-107면 참조.

13) 임병헌, 앞의 글, 95면 이하 참조.

14) G. 그레사케, 「은총 - 선사된 자유」, 졸역, 성 바오로 출판사 1979년, 39-43면 참조.

15) 졸문, “전환기의 복음 선교”, 「그리스도와 구원」, 342-345면 참조.

16) 졸문, “분단 공동체 교회의 종말론적 사명”, 「2000년대의 한국 교회」, 256-279면 참조.

17) 이제민, 앞의 글, 41면; 임병헌, 앞의 글, 96면 이하 참조.

18) 졸저, 「익명의 그리스도인」, 95-100, 330-339면 참조.

19) 교황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27항; J. Neuner, J. Dupuis, The Christian Faith  in the Doctrinal Documents of the Catholic Church, London(Collins) 1983년, 143-198면 참조.  

20) 졸문, “전환기의 교회 이해”, 「그리스도와 구원」, 189-256면; 「익명의 그리스도인」, 175-183, 339-343면; “교회와 타종교와의 관계”, 「사목」148호(1991.5.), 80-90면 참조.

21) 졸문, “신앙의 보편성과 역사성”, 「그리스도와 구원」, 17-35면; “구원 은총과 고통의 문제”, 같은 책, 57-73면 참조.

2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 12항 참조.

23) 「평신도 교령」, 5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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