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2호> 다큐멘트

2002. 4. 2. 오후 5:32:20

글자

 선교

다큐멘트

펠릭스 A. 마차도 몬시뇰(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차관보)

 

 

  종교 다원성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들어가는 말

 

       아린제 추기경은 최근에 집필한 글들 가운데에서 우리 세상의 종교적 다원성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는 하나의 종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대단히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전 세계 인구 중 18%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두 합치면 인류 전체의 3분의 1가량 됩니다.

    이슬람교인들의 수효는 17%, 힌두교인은 13%, 불교인은 7% 가량 됩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많은

    종교들도 존재합니다. 유다교인, 전통 종교의 신봉자들, 시크교인, 바하이교인, 자이나교인, 조로아스터교인,

    신도교인 그밖에 타종교 신봉자들이 있습니다.”1) "이러한 종교들은 많은 사람들의 깊은 영혼에서 나오는

    생활한 표현들입니다. 이 종교들은 수천 년에 걸쳐 하느님 탐구의 반향을 간직해 왔고 심오한 경전의 감명 깊은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의 입증된 지혜를 전달하는 데 공헌하고 있습니다. 이 종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민족들에게 인간의 현세적 삶을 괴롭히는 근본적 문제들을 어떻게 살며, 기도하고, 대처해야

    할 지를 가르쳐 왔습니다.”2) 아린제 추기경은 결론적으로 종교간 대화는 우리 세상의 종교적 다원성이 요구

    하는 것이라고3) 말하였다.

     

      이 논술에서 종교적 다원성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나는 가톨릭의

    관점을 제시하되,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의 관점들은 다루지 않을 것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종교간 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2)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종교간 대화를 위한 근거들은 무엇인가?

          3) 그리스도교인들이 종교간 대화에 참여하는 주요 동기는 무엇인가?

          4) 성서와 교부들은 타종교 민족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르치는가?

          5)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따르면 어떠한 구원이 조망되는가?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타종교 전통에 대한 태도는 몇 가지 단계들을 거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각 단계

    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타종교들에 대한 호교적 접근, 겸양한 접근, 탐구적 접근, 토론 지향적 접근, 대화적이며

     친근한 접근과 같이 각각 독특한 접근을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초창기에 그리스도교는 타종교 전통의 영향을 받은 듯이 보인다.4)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유일하고,  

    독창적이며, 특이한 성격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면서, 타종교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이 단계의 교회는

    타종교 전통을 과소 평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타종교의 사람들이 절대자를 표현하고 찾았던 그

    탐구의 완성으로서 제시하였다.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이러한 만남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을

    더 잘 이해하고 정의하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대의 이단들과

    만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성을 수호하려는 데 주로 관심을 두고, 타종교 전통에 대한 우월한 입장이나

    짐짓 겸양한 태도를 취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접근에서 타종교의 전통은 완전히 무시되거나 또는 타종교

    신봉자들의 역할이 단순히 과소 평가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이 여러 대륙들을 식민지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유럽의 `계몽주의’시대와 더불어 타문화와 종교들을 더욱 직접적으로 빈번하게 접촉하였으며, 타종교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그리스도교와 비교 연구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와

    그 종교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하여 논쟁과 토론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어떤 근본적 태도 변화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이 단계에서 교회는 타종교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전통에 민감하게 접근하며 그 영적, 인간적 가치를 신중하게 고려한다. 교회는 이러한 종교 전통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조건의 심오한 신비에 대한 대답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온 증거를 보여 주며, 수백만

    신봉자들의 열망과 종교 체험을 표현해 왔고, 오늘날도 계속하여 그렇게 하고 있기에”5) 교회가 그 점을 존경하게

    한다고 확신한다. 교회는 타종교의 신자들이 이 지구촌 공동체에서 인간의 공동 목적들을 위해 함께 일하는

    파트너임을 알게 되었다.6) 결론적으로 교회는 오늘날 종교적 경계선 너머에 있는 친구들을 합법적으로 자랑하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단계는 타종교들에 대한 신학적 발전이 그리스도교에 깊이 영향을 미친 일련의 역사에

    기인한다.7)

     

      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해되었던 종교간 대화

 

          불과 50여 년 전 그리스도교는 타종교와 긍정적 관계를 가져야 할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태도 변화의 원인들은 모두 교회 안팎에서 발견된다. 다원적 실재로서 오늘날 점점 더 경험하는 세계의 진보적

    변화들은 타종교들과 대화하고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존경심을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오늘날 세계의 변화에

    비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간직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 가톨릭 교회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 선언의 1년 전인 1964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로마 교황청에 ‘비그리스도교 사무국’

    (Secretariat for Non-Christians)을 설립하였다.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는 1971년 복음선교연구국에 ‘

    살아 있는 신앙들과 사상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기구들은 모두

    각각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그 명칭의 변화와 함께 시대에 따른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은

    1988년에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가 되었으며, ‘살아 있는 신앙들과 사상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한 소위원회’는 이제 ‘종교간 관계 사무소’(Office on Inter-Religious Relations)가 되었다. 각 상황에서

    이러한 기구들은 여러 해에 걸쳐 일어난 심오하고 진지한 신학적 반성의 결과들이다.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정확한 안내서들과 지침서들에 근거하여,8) 그리스도인들은‘종교간 대화’(Interreligious

    Dialogue)라는 용어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순수하게 인간적 차원에서 이것은 공동의 목표로 이끌거나 더 깊은 차원에서 상호 인격적 친교로 이끄는

    상호 교환을 의미한다. 둘째, 대화는 교회의 복음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모든 활동에 배어 있어야 할 존경과 우정의

    태도로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셋째, 종교 다원성의 관계에서 대화는 진리에 순종하고 자유를 존경하는 ‘상호

    이해와 풍요를 위하여 타종교 신자들과, 공동체들과 갖는 모든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종교 상호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각 종교 신념의 증언인 동시에 탐구이다.”9) 곧, 그리스도인들이 대화에 진취적으로 개방되어도,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적 정체성에 굳건히 충실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화는 우리의 신념을 심도 있게 이루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신앙 문제에서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완전하게 머물면 그만큼 우리의 대화는  솔직하고 충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타종교 전통과 대화함으로써 자신을 더욱더 잘 이해하게 되고, 타인을 올바르게 알게 되며

    두려움과 오해를 쫓아 버리고 상대방과 더불어 서로 영향을 받아 고무되며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는

    성스러운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하느님을 현존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상대방

    에게 개방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기 때문이다.”10) 교회는 신자들에게 타종교 전통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도록 권고하며 격려하고 있다. 교회는 더 나아가 타종교 신자들과 실제적 대화를 체험하는 것 외에,

    가능한 한 그리스도인이 타종교 전통을 신학적으로 또는 일반적으로라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타종교들은 교회에 좋은 도전을 던져 준다.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령의 작용의 표지를

    인식하고 인정하도록, 그리고 교회가 자신의 본성을 깊이 반성하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유산으로 받은 계시의

    충만함을 증거 하도록 자극한다.”11)

 

      2.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종교간 대화를 위한 근거들

 

      교회는 단순히 이론적 또는 사변적 실습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전 세계 도처에 있는 타종교 전통들과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교회가 소박하지만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교회는 이러한 시도를 신속하고 진지하게 지속시키기 위하여 처음부터 종교간 대화를 실천하기 위한 교회의 견해와

    입장과 방법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타종교 전통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타종교 전통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인격적, 신학적, 사목적 도전으로 나타난다. 교회는

    자신의 신앙과 교리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희석시키거나 타협하는 일이 없이, 타종교인들과 계속 대화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만남은 타종교인들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에 신앙적으로 투신하도록

    교육받거나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신념이 절충되거나 상대화될 필요가 없다. 반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전통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체험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가톨릭 교회는 “타종교와의 대화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일부이다.”12)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만민 선교에 반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13) 만민 선교와 특별히 관련된 표현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교의 길은 증언, 복음 선포,

    회개와 세례, 교회의 기초 공동체들, 토착화, 종교간 대화, 인간 발전과 애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과 종교간 대화에 참여하는 일 사이에 갈등은 없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든 민족을 향한 교회

    사명의 맥락 안에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활동은 구별되며 서로 교체되지 않는다.

      교회는 “종교간 대화가 교회 선교의 한 요소이듯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 선포

    또한 한 요소가 된다.… …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무시하거나 거절할 수는 없다.”14)

     

      3. 진리를 위한 공동 탐구: 종교간 대화를 위한 주요 동기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사랑 안에서 진리를 찾는다. 그는 순간적 기회주의의 전략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의 자극으로

    다른 이에게 다가간다. 교회는 “이 대화를,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16.19-20)라고

    선포하는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랑의 행위로 본다.”15)  대화의 목표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교황 바오로 6세는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시간과 공간에 무한히 스며드시는 사랑을

    명상합니다. …… 모든 실재와 모든 사건은 그분의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16)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상

    우선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의 한 문헌은 “교회가 대화에 투신하는 근거는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신학적인 것이다.”17)  다음은 이러한 신학적 동기들이다.

 

      1. 교회는 아버지께서 창조와 역사 안에 숨겨 놓으신 모든 부(富)를 밝히고 충만으로 이끌 의무를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또는 민족들의 고유 의례와 문화에 심어져 있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

    없어지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치유되고 승화되며

    완성되게 한다.”18)

     

      2.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민족들의 빛’으로서, 각각의 인간 존재와 관련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배제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 구속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각자에게 또 누구에게나 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19)

     

      3. 성령께서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경계 밖에서도 활동하신다.20) 또한 교회의 길을 예견하시고 함께 하신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분의 현존의 표지들을 식별하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며, 겸손하고 사려 깊은 협력자로서

    그분을 섬기도록 재촉 받음을 느낀다. “진리와 선함 그리고 결국 하느님께 향한 인간 정신의 모든 탐구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다양한 종교들은 정확히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원초적 인간의 개방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들의 발생 근원에, 하느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창설자들을

    때때로 발견합니다. 이 체험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다양한 종교들의 교리와 예식 그리고 규범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21)

     

      4. 교회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도록, 또한 그 밖의 사람들과 함께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완성하도록 구비되고 위임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므로...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유대로 더욱 가까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교회의 이러한 직무는 현대의 상황에서 한층 더 절박해지고 있다.”22)

       

      5. 교회는 타종교 전통들 안에 ‘참되고 좋은 요소들’, ‘종교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배로운 것들’,

    ‘명상의 씨앗들’, ‘진리와 은총의 요소들’, ‘말씀의 씨앗들’, 그리고 ‘모든 인류를 비추는 진리의 빛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의를 끌고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들의 영적 유산은 우리와

    일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것에서도 진정 대화로 초대한다.

      종교간의 만남은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심오하고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들이 제기됨을 간과할 수 없다.

 

      ·하느님의 창조 의도와 구원 계획에서 타종교 전통에 속한 백성들의 위치

      ·종교 다원성의 세계에서 하느님의 선택의 의미와 목적

      ·그리스도교적 구원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중심성

      ·성령 활동(역사)의 범위

      ·다원 사회에서 교회의 소명과 목적

      ·성서 텍스트들의 해석

      ·타민족들의 믿음, 신념 그리고 예배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선교의 전제들

      ·종교간의 맥락에서 개종의 의미

 

      4. 타종교 전통들에 대한 성서와 교부들의 태도

 

      종교들의 신학적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접근은 “종교 신학이 아직 명확하게 인식론적으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에”23)  큰 주의를 요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신학이 ‘지혜를 찾는 신앙’(fides quarens intellectum)

    이라면, 어떻게 ‘교의적 원칙’을 포기할 수 있는지 또는 자신의 고유한 진리 원천들을 없앤다면 어떻게 신학적으로 반영되는 지에 대한 설명이 더 요구되어진다.”24)  

      실제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 신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보편적 종교 신학이 가능할까? 이러한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주장되는데, 정의한 대로 신학이 특정한 신앙의 빛 안에서 실재감(sense of reality)을

    만든다면 그 특정한 신앙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 신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코다 신부

    (Fr. Coda)는 이러한 문제를 상세히 설명할 과제를 갖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종교간 대화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명료화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었다.2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저히 교회적이며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갈증은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과, 우리의 평범한 현대

    세계의 모든 인간 활동 영역에서 발견된다는 것에 개방된 마음으로 그러한 신학에 참여하는 일이다. “신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에서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역사와 살아 있는 문헌들을 통하여, 인간 사회의 체험, 곧 오늘날

    남자들과 여자들의 체험 한가운데로 지속적으로 들어가 그 체험을 우리 시대의 사도적 도전들에 창조적인 응답으로

    변화시키는 신앙의 살아 있는 증언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이해하는 결실을 바라보도록 초대되었다.”26)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종교 신학”을 정당하게 취급하기 위해서는 성서 그 자체를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성서는 타종교들에 대하여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가?27)  타종교 전통의 사람들에 대한 성서의 바람직한 태도를 수립한

    예들이 있다. 성서는 구약성서에서 비이스라엘인들(이교도 성인들)에 대하여 말하고, 그들이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때부터 모든 민족들과 계약을 맺으신 어떤 구원 역사에 속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방인 대사제 멜키세덱(창세 14,17-20)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섬겼던 왕이며 사제이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축복한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선조인 아브라함까지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히브 7, 4). 세바의 여왕(1열왕 10, 1-13)은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몸소 솔로몬의

    지혜를 보러 왔으며 올바름과 정의를 행사하도록 솔로몬을 왕좌에 앉히신 그의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에 대해 언급하시기를,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도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마태 12, 42).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창세 4―9장)는 신앙의

    모델로 제시된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친히 계시하셨던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한 분 하느님을 알고 찬양하고 믿었다.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셨을 때 그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방주를 마련해서 자기 가족을 구했으며, 그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히브 11, 4-7).

     

      욥은 예외적으로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욥 1,1).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으며,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잃었을 때에도 그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현명한 사람 욥은 하느님 앞에서 인내심을 간직하였다. 그는 기도하였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1).

      물론, 성서에서 타종교들을 부정적으로 보여 주는 예들도 발견할 수 있다. 그 한가지 예로 엘리야 예언자가 부추긴

    바알 사제들의 학살이다(1열왕 18,18 이하; 신명 7,1-5; 여호 6,17-21 참조). 이방인들의 종교 생활과 그들의 종교 전통들에

    대한 신약성서의 관련 구절들은 대조적으로 나타나지만, 보완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한편,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그분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우상 숭배와 악행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로마서의 부정적인 판단도 있다(로마,18-32 참조).

    다른 한편,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리가오니아 사람들에게 한 연설(사도 14, 8-18 참조)과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행한

    연설 모두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데, 여기에서 그는 그들의 종교 정신을 칭찬했으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으로 예배했던 그분에 대하여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사도 17,22-34 참조).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혜 전통이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하느님의 지혜로서 적용된 것으로 곧, 모든 사람을 비추는 하느님의

    말씀(요한 1,9) 그리고 그분의 강생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시된(요한 1,14) 하느님의 지혜에 대해서이다.28) 그러므로 성서

    텍스트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계시하시는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 이며, 또한 이러한 신앙의 보완으로, 마음의 회개(metanoia)를 기꺼이 할 수 있느냐  아니냐이다. ‘이교도

    성인들’이 칭찬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신앙이며 회개할 수 있는 준비성이다. 그리고 명백히 비난받는 것은 우상 숭배의

    실천이다.

      엄밀히 말해서 타종교들은 성서 특히 신약성서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하느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자이시며, 하느님의 은총이 승리하는 기쁜 소식의 전달자이다. 그분 메시지의 대조법은 세상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절을 말한다(마르 6,1-5).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민족에 속하지 않는 남자들과 여자들에 대하여 개방적 태도를 보여 주신다. 그분은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 안에 있는 선을 알아보신다. 그분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준비성을 보고, 이스라엘에서 그러한 신앙을 본 일이 없다고

    감탄하신다(마태 8,5-13 참조). 그분은 ‘외국인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하시고(마르 7,24-30; 마태 15,21-28), 이러한

    기적들은 (하느님) 왕국의 도래의 징조들이 된다. 그분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그녀에게 예배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요한 4,23)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지는 당신의 삶의 증거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당신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또한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신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메시지는 특별히 선택된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사실 명시적으로 이방인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포하신다(마태 8,10-11; 11,20-24; 25,31-32.34 참조).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나라는 또한 기도로써 그 나라가 임하시도록 청해야 하는 아버지의 나라인 동시에

    (마태 6,10 참조) 예수께서 스스로 그 나라의 왕이 되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시기에 예수님의 나라이기도 하다(요한

    18,33-37).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계시와 구원의 충만함과, 모든

    민족이 바라는 열망의 성취를 본다.29)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어둠과 죄악의 옛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부활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세상에는 근본적인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발전하는 하나의 구원

    역사와 동일하다는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30) 그리스도교 종교 신학의 핵심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이다.31)

      타종교들을 염두에 두면서, 초기 교부들은 그분의 말씀(Logos)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편적이며 실제적인 이 세상의

    현존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초기 교부들의 관심은 타종교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조리 있게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체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어떤 복합성과 다양성을 나타내는 정신적 구조 안에서 추론

    하면서도 그리스도적, 성서적, 그리고 교회적인 충족성을 통합하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핵심 사상은 그리스도

    안에 제공된 것이 로고스라는 것이며, 모든 진리가 추구되고 발견되는 유일한 실재라는 것이다.”32)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성서 후기의 대조되는 자료에는, 그 시대의 종교 세계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판단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주목할 만한 개방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교부들이 신약성서에 반영되어 있는

    지혜서의 전통을 되살렸다. 특히 2세기와 3세기 초의 유스티노, 이레네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같은 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제 민족들 가운데에 뿌려져 있는 ‘씨앗들’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교 체제 밖이나 이전에도 하느님께서 비록 불완전한 방식이긴 하지만 이미 당신을 드러내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말씀의 현시는 그 말씀을 지칭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계시를 예고하는 것이다. 사실, 이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역사 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제시하였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시며 인류와

    대화를 나누심에 따라 역사는 구원의 역사가 된다.

     

      이러한 하느님의 현시와 대화의 과정은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생하심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레네오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곧 아담, 노아, 모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맺으신 네 가지 계약을

    구별하고 있다.33) 이러한 교부들의 사조는 그 중요성이 결코 평가 절하되지 않고, 아우구스티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데,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마지막 저서들에서, 강생 이전에도 그리스도 신비가 보편적으로 현존했고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시키시면서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시초부터’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34)유스티노의 중요한 저술인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he Trypho)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이 저서는 초대 그리스도교가 발전시켰던 방법과 주제들의 생각을 전한다. 이 저서의 논점은 성서에 기초하고 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들의 예언과, 모세의 율법과, 성서의 위대한 사건들에 대한 결정적 완성이라는 것이다. 유스티노는 종교 전통들 안에 로고스에 의해 뿌려진 ‘씨앗들’(Logos spermatikos), 말씀의 강생 이전에 이미 우주 전체에 ‘뿌려져 있는’(disseminated) 하느님의 말씀이 발견된다는 사상을 말하고 있다. 강생을 통하여 말씀의 현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35)

      그 다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교 이전 지혜의 최상적 표현들을 통하여 활동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유다인들의 율법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36) 그에게 철학이란 단순한

    사상 체계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종교’로 여기는 교리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철학은 그리스 세계에 국한된 것이아니라 페르시아, 인도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37)

      나는 이 점에서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의 맥락은 성서 시대 또는 심지어 초기 교부 시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오늘날의 종교 다원성이 구별되는 것은 불가피한 세계적 차원의 종교간 만남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따라 타종교

    전통의 긍정적 가치를 인식하게 한 것이다.

 

      5. 그리스도교적 구원관과 타종교 전통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러한 구원 계획은 세상 창조 이전에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어떠한 제한이 없지만 인간이 진리를

    알아야 하는 열망 곧, 신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과 항상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의 구원 가능성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런데 “타종교 전통들이 구원의 길로서 인정될 수 있을까?”,

    “종교들은 그 구성원들에게 구원을 중개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토론하는 이러한 질문들은 타종교 전통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구원 신비와 관련된 더 큰 긴밀성과 명확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38)

      그리스도교적 견지에서 중개의 문제는 근본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개자로

    믿는다. 물론, 위의 문맥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고 확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대답은

    그다지 단순하지만은 않다. 계시와 교부들을 참조한 최근의 신학 토론을 조명해 보면, 그리스도교적 대답은 미묘한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모든 종교 전통을 ‘전체적으로 구원적’(globally salvific)인 것으로 단순히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종교의 복잡성을 모르는 것은 인식론의 오류이며, 방법론적 실수이다. 둘째, 종교들이 죄스럽고

    애매한 것으로 단순히 경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관련될 수 있는 가치들을 담고 있으며,

    그러므로 교회 신비의 풍부한 유산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 종교들에는 복음의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는 동시에, 어떤 경우엔 그것들이 전혀 다른 구원 개념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교적 전망에서

    구원은 (종교적일지라도) 일을 완성함으로써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신앙으로 중개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 ‘중개’의 다른 가능성은 유일한 중개자이신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와 별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유일한 중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결합되어 있다. ‘중개자’라는 용어는 정확히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자질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중개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현인’이나 ‘영웅’ 또는 ‘성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용어는 그 인격 안에 ‘참된 사람’과  ‘참된

    하느님’사이에 현존하는 어떤 인격을 의미한다. 이 칭호는 유일하게 예수께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유일무이성에 전적으로 참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의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

    안에서 유일한 개별적 존재로 인간 조건을 지니고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원이란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타종교 전통의 신봉자들이 구원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를 통하여 그들이 구원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그들의 종교가 비록 ‘틈이 있고, 불충분하고,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주요하고 본질적 표현인 그 영적

    풍요함을 통하여 개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데

    부족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39) 곧,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죽음조차 당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연관되어 있으며, 희망으로부터 오는 힘 안에서 부활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있을 수 없다.40) 종교들의 구원적 가치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보편적이고 실재적 현존의 맥락 안에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의 신앙과 세례의 초대는

    이러한 맥락에서 또한 이해되어야 한다.

 

      맺는 말

 

      그리스도교에서 종교간 대화의 실천은 건전한 그리스도교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처럼 단지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되신 영원한 말씀 안에서 말씀하시는 바로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찍부터

    인간의 하느님 추구를 표현해 왔던 다른 모든 종교들로부터 그리스도교가 구별되는 본질적 요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육화에서 그 출발점을 지닙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경우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 관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이 당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위격으로 오신 하느님의

    경우인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선포된 바로 그것입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께서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요한 1, 18). 이처럼 육화된

    말씀은 인류의 모든 종교들 안에 있는 염원의 성취입니다. 이 성취는 바로 하느님께서 몸소 실현하신 것이며, 인간의

    모든 기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총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더 이상 ‘하느님을 더듬어 찾는 것’

    (사도 17, 27 참조)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응답이고, 하느님께서 그분 안에서 각 개인에게 말씀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각 개인이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게 되는 분, 곧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말씀이신, 유일한 인간이신 분께서 가능하게 해주신

    응답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창조물이 바로 이 인간 안에서 하느님께 응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만물은 그 자신을 되찾고, 높이 들어올려져 그들이 처음에 나왔던 창조주께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세계 모든 종교의 염원의 성취이시고, 그 성취이신 바로 그분은 모든 종교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완성이십니다.”41) 이것은 교회가 타종교 전통들을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을 깊이 존경하고 인류의 선을 위하여

    그들과 노력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서도, 교회는 참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깊은 확신을 갖고 제안한다.42) 전 우주는 그 ‘씨앗들’을 통하여 불완전한 방식으로 단지 어렴풋이 보이지만, 항상 현재로서 육화의 신비 안에 드러나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인격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인류의 타종교 전통들이 그 안에 ‘참되고 선한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길이긴 하지만 말씀의 ‘씨앗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교회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1, 타종교 전통들 안에 은총의 요소들이 있다는 것.

      2, 타종교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 명시적인 신앙 고백에 이르지 않는다 해도

          ‘구원적 대화’라는 것.

      3, 타종교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상호 풍요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

      4, 타종교인들의 기도는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시는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이 계시기에 효과가 있다는 것.

      5,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존재하는”(골로 1,16; 요한 1,3)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근본적인 인간 가족의 기초적 일치를

          세우셨다는 것을 항상 긍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의 실천은 교회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집단으로 단순히 보는 것과는 달리,

    이 세상을 복합적이고 다양한 실재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또한 깨닫게 해준다.43) 예를 들면, 세계에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 타종교 전통을 실천하며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44)

    탈 그리스도교화 된 사람들, 비 신앙인이 되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세례는 받았으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구를 ‘다양한 종교들의 지도’로 보고 있다.45)

    교회는, 종교간 대화의 실천은 교회가 주의를 기울일만한 몇 가지 진지한 문제들을 제기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바꾸지는 않지만 그것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46)

      1,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타종교 신봉자들의 마음을 거슬리지 않고, 그 종교들을 통해 표명된, 인간의 모든

             종교적 갈증의 ‘성취’로서 제시할 수 있는가?

         2, 오늘날 다원 종교적 세계의 상황에서 주님이시며 유일한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구원의 정상적  

             수단으로서 교회를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구원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분리시키지 않도록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다원적 사회 안에서, 이 ‘계시된 진리’를 실천하도록 어떻게 옮길 수 있는가?

         3, 타종교 전통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신학 내용과 그 방법론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4, 어떻게 종교 다원성이 하느님의 목적에 적합한가?

         5, 종교들의 맥락 안에서, 언어들과 문화들의 다원성이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서 하느님의 선교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6,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타협 없이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신봉자들의

             종교 생활과 신앙에 대하여 더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는 타종교 전통들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더 긍정적 이해에 비추어 그들의 신앙을 재해석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교회와 타종교 전통들의 대화 뿐 아니라, 그 종교 전통들간의 대화도 권장하고 촉진한다. 이것은 교회가 성사,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47)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 방법이다. 교회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넘기실 왕국의 차원들, 진리와 생명, 거룩함, 정의, 사랑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을

    정화하고, 협력하며, 만나게 되는 모든 종교 제도들과 운동들을 격려하도록 성령의 초대를 받았다고 믿는다.

      교회는, 대화의 상대자가 타종교적 신념을 지닌 사람을 만나 종교적 믿음, 실천, 가치들을 진지하고 침착하게 대면할 때

    종교간 대화는 각 참석자가 자신의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때때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견해와 만났을 때, 종교적 확신을 더 잘 평가하고, 연구하며, 심화시키고, 이해하며, 더 큰 투신으로 살았던 것을 경험하였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참여자 개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 전통들도 풍요롭게 될 수 있다.48)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그들의 종교 전통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탐구를 소외시키거나 반대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그분은 소외된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계시로서 강생하신 인류의 모든

    종교 전통들의 염원의 완성이시다. 비록 감추어져 있고 때로는 모호하지만, 그분은 그들 안에 진실하고, 고상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발견되는 한 타종교 전통들 안에 영원히 현존하신다. 이것이 대화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전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말씀의 씨앗을 기꺼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찾아내야 한다.”49)

    왜냐하면, “다양한 종교 전통들 안에서 현존하고 활동하시는 ‘진리의 씨앗들’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며’(요한 1,9 참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이 되신(1,14 참조)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 원문 : Mgr. Felix A. Machado, “The Teaching of Christianity regarding Religious Plurality”,

                 in Omnis Terra, N.317, May 2001, 196-206면.(번역-김웅태 신부)

     

      주(註)

     

    1) D. Barrett,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Nairobi, 1982년, 782-785면 참조.

    2)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53항.

    3)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 “제삼천년기의 종교간 대화”(Interreligious Dialogue in the Third Millennium),

        Studia Missionalia, vol. 48,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 출판부, 로마, 1999년, 203-213면 참조.

    4) Julian SALDANHA, Inculturation, St. Paul’s Publications, Bombay, 1987년, 25-30면 참조.

    5) 인류복음화성과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대화와 선포」(Dialogue and Proclamation)- 종교간 대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관한 숙고와 방향, 바티칸 시국, 1991년, 14항.

    6) Stanley J. SAMARTHA, Between Two Cultures, Ecumenical Ministry in a Pluralist World, Geneva, WCC Publications,

        1996년, 8면.

    7) J. DUPUIS, Toward a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us Pluralism, New York, Orbis Press, 1997년, 25면.

    8) PCID, 「타종교들의 신봉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 대화와 선교에 관한 반성과 방향들」(The Attitude of the Church

        Towards the Followers of Other Religions, Reflexions and Orientations on Dialogue and Mission), 바티칸 시국,

        1984년; 「대화와 선포」,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 「살아 있는 신앙들과 사상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

        지침」(Guidelines on 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s and Ideologies), 1979년; -, 「내 이웃의 신앙과 나의

        신앙」(My Neighbour’s Faith and Mine), 제네바, 1986년.

    9)「대화와 선포」, 1991년, 9항.

    10) 요한 바오로 2세, “마드라스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연설”(Discourse to People of Other Faiths in   

          Madras, 1986.2.5.), L’Osservatore Romano (English, 1986.2.10.), 14면.

    11) 요한 바오로 2세, 「교회의 선교 사명」, 56항.

    12) 위의 책, 55항.

    13) 교회는 ‘모든 이’에게 파견된다. ‘모든 민족’(gentes)이라는 단어는 성서적 의미로 이해되는데, 예를 들면,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한다. 곧,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이들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의 선교 활동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복음 메시지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본

      의무이다. 이 의무를 성취하고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내적 쇄신을 상기시켰다. 오늘날

      명백히 선교 활동의 초점은 사실상 이미 과거에 이루었던 영토 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있는 곳에서 타종교

      전통들의 다양하고 발전하는 문화에 토착화되고 그 안에서 ‘실제적(active)’ 현존이 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간 대화와 토착화의 요구이다. Calvert ALEXANDER,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입문”, in The Documents of

      Vatican II, Water M. Abbot 편, 런던, Geoffrey Chapman, 1966년, 580-583면 참조.

    14) 요한 바오로 2세, 「비그리스도교 사무국 회보」(1987/3), 제66항.

    15) 요한 바오로 2세, 「뉴델리의 종교 지도자들에게」(To the Religious Leaders in New Delhi), 1999.11.7.

    16)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대화와 선포」, 22항.

    17) 위와 같음.

    18) 「교회 헌장」, 17항.

    19)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 14항.

    20) 「교회 헌장」, 16항; 「사목 헌장」, 22항, ;「선교 교령」, 15항.

    21) 요한 바오로 2세, 1998년 9월 9일 일반 알현에서 “타종교들 안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씨앗들’”, 2항,

          L’Osservatore Romano, 영문판, 1998.9.16., 37면.

    22) 「교회 헌장」, 1항.

    23) 국제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들」(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s), 바티칸, 1996년, 4항.

    24) 위의 책, 6항. 7항 참조.: 이 문헌은 그리스도교가 종교 다원성의 맥락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설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요구하는 진리와 보편성에 대한 척도, 전체적 구원 역사 안에서 종교들의 의미, 기능,

      특별한 가치를 찾는 기준,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특수한 내용들을 가지고 종교들 자체를

      연구하고 검토하는 기준을 설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문헌은 세 가지 주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가) 하느님의

      신비와 종교들, 나) 그리스도의 신비와 종교들, 다) 교회의 신비와 종교들.

    25) Mariasusai DHAVAMONY, 「그리스도교적 종교 신학, 세계 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관한 체계적

      숙고」(Ch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A Systematic Reflexion on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World

      Religions), Vol.108, Berne, Peter Lang AG, European Academic Publishers, 1998년 참조.

    26) P. H. KOLVENBACH, “우리의 신학적 과제”(Our Theological Task), Vidyajyoti Journal of Theology, 60, 1996년,

         8면.

    27) 이 주제에 관한 몇몇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Ruiz de MENEZES, “타종교들과의 관계에서 성서”(The Bible in Relation

      to Other Religions), Bible Bhasyam, 1989.12., Vol.XV, No.4, 222-253면; L. LEGRAND, “성서와 민족들의

      종교들”(The Bible and the Relations of the Nations)”, Indian Theological Studies, 32(3), 1995.9., 193-207면; L.

      LEGRAND, “예수와 초대 교회, 성서적 조명”,(J럖us et l’Eglise primitive, un  럄lairage biblique), Spiritus, 138,

      1995.2., 64-77면.

    28) 「대화와 선포」, 바티칸 시국, 1991년, 23항.

    29) 위의 책, 21-22항.

    30) Lucien LEGRAND, “예수와 초대 교회, 성서적 조명” 1, 64-77면.

    31) Michael AMALADOSS, “종교 다원주의와 그리스도의 의미”(The Pluralism of Religions and the Significance of

      Christ), Vidyajyoti journal of Theological Reflexion, Vol.LIII, 1989.8., No.8, 401-420면 참조.

    32) Bruno FORTE,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시며 구세주 그리고 종교들의 만남: 그리스도교와 대화의 길의 역설”(Jesus

      Christ, Lord and Saviour, and the Encounter of Religions: The Paradox of Christianity and the way of Dialogue),

      Pro Dialogo, 85-86, 1994/1, 59-60면.

    33) 이레네오, 「반이단론」(Adv. Haer.), 3,11,8.

    34) 아우구스티노, Retract., 1,13,3; Enarr. In Ps. 118 Sermo 29,9; 142,3; 「대화와 선포」, 24-25항.

    35) 유스티노, 1 Apol. 46,1-4; 2 Apol. 8,1; 10,1-3; 13,4-6.

    36) Stromates, I,V,3.

    37) Michel F귾OU,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른 종교들」(Les Religions selon la foi chr럌tienne),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96년, 31-40면 참조.

    38) A.D. BALCHAND, “아시아에서 발행된 신학 잡지들 내의 아시아 그리스도교 신학 저술들에 따른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의 구원적 가치”(The Salvific Value of Non-Christian Religions According to Asian Christian Theologians

      Writing in Asian-Published Theological Journals 1965-1970), Teaching All Nations, East Asian Pastoral Institute,

      Manila, 10, 1973년, 10-37. 115-152면 참조.

    39) 「사목 헌장」, 22항.

    40) 요한 바오로 2세, 「교회의 선교 사명」, 29항.

    41) 요한 바오로 2세, 「제삼천년기」, 6-7항.

    42) 나는 교회의 대화적 태도의 한 중요한 결과에 대해 여러분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곧,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는 일을 부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자유’에 관한 교회의 명백한 입장이다.

      “인간은 종교의 자유를 갖고 있다. 이러한 자유는, 각 사람이 개인이나 사회적 단체나 그 밖의 온갖 인간적 권력의

      강제를 받지 말아야 하며, 그와 같이 종교 문제에서도, 그 누구도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되지 않으며,

      또 사적이나 공적으로, 단독이나 단체의 일원으로 정당한 범위 내에서 자기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음에

      있다”(「종교 자유 선언」, 2항).

    43)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49-59항 참조.

    44) 위의 책, 53항 참조: “(이 종교들 안에서) 우리는 수천년 동안에 걸쳐 하느님을 추구해 온 소리의 반향을 들을 수 있으며

      비록 하느님을 추구하는 내용은 불완전하지만 대부분 진지하고 바른 마음으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심오한 경전의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대로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왔다.”45)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11항.

    46) 신앙교리성, 문헌 「교회의 신비」(Mysterium Ecclesiae)는 교의의 재구성을 목표로 한결같은 방식으로 중요하게

      작업해야 할 그 다섯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들 중 하나는, 예를 들면, 교의적 진리가 처음에 실제로

      불완전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과 인간적 지식의 넓은 맥락 안에

      이해되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완벽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47) 「교회 헌장」, 1항.

    48) Francis Cardinal ARINZE, 「다른 신봉자들과의 만남」(Meeting Other Believers), Herefordshire, Gracewing,

      1997년, 10면.

    49) 「선교 교령」, 11항.

    5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8년 9월 9일 수요 알현에서 하신 연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의 수요 알현들에서

       「종교 다원성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요약하였다; 「위대한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 (Dialogue

       with the Great World Religions), 1999.5.19. 참조.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요한 복음이 우리에게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라고 말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분 안에 당신을 정확하게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긴급한 필요성과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거리낌없이 전해야 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께서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성실하게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안에서 이미 신비롭게 현존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과 함께, 교회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향하여 그분 영광의 광채 안에서 역사를 통한

      자신의 순례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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