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제가 '계간 관세사' 2015. 신년호에 쓴 글입니다.
혹시 교우님들의 교황님에 대한 이해에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올려 봤습니다.
낮은 곳으로
그날 나는 광화문 광장 교보문고 빌딩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앞으로 거행될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복식은 오전 열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광화문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드넓은 광장은 전국 각처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로 인하여 우리 성당 교우들의 입장 시간인 여덟시 반쯤에는 이미 사람의 이동이 불편할 정도로 꽉 차있었다.
내 평생에 그토록 많은 인파 속에 휩쓸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부딪치고 밀리면서도 힘들다거나 번거롭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어린 시절 동네에서 열렸던 단오절 행사나 형과 누나가 등장하는 학예회를 기다리던 때와 같은 흥분과 기대와 설렘을 느끼며 그 모든 불편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나이에 설렘을 느끼며 기대감을 갖고 기다릴 수 있는 대상이 있다니…‥. 나의 가슴 한 켠에 아직도 오랜 세월 전에 사라져 없어졌을 듯한 마음의 순수함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스스로 적지 않은 경이로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홉시가 되자 서소문 순교성지를 출발한 교황이 행사장 입구에 들어섰다는 장내 사회자의 안내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질서정연했던 사람들의 앉음새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중앙통로를 보호하고 있는 펜스 쪽으로 서서히 몰려갔고, 이에 따라 여러 겹의 사람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그들의 눈은 일제히 교황이 올 서울 역 방향으로 향했다.
나도 서너 번째 만들어진 사람 울타리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나의 바로 앞을 지나갈 교황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동영상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탈리아와 로마 등 유럽 남부를 포함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 온 사람들의 큰 자랑거리 중 하나는 바티칸 궁전을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멀리서나마 교황의 모습을 보았다며 그 당시의 상황설명에 열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여행 일정과 맞지 않아 교황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텔레비전을 통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수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멀리 발코니에 나타난 교황의 윤곽조차 잡을 수 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광경을 적지 않게 보아 온 터였다.
그토록 대하기 어려운, 아마도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귀한 기회로 교황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흥분되어 열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열광 이면에서 작용하는 것이 단순히 교황이라는 세계 유일의 존재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희귀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착좌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세계의 가톨릭신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부각된 그의 행적들이 그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인기를 높이는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아홉시 반 쯤 되자 교황의 행렬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비바 파파(Viva Papa)!"를 연호하며 두 손 들어 오랫동안 잡아둘 듯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신자들에게 그 특유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두 손 들어 축복을 내리는 교황의 모습은,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앞에 오래도록 머물지 않았다. 무척 짧은 순간이었다.
다행히 2,3미터 앞을 스쳐 지나간 교황의 모습은 고스란히 내 스마트폰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팔사이로 나타난 교황의 모습과 인자한 미소가 담긴 동영상을 반복해 돌려보면서 나는 그 짧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교황의 주재로 진행된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은 12시 가까이 되어 끝났고, 교황은 다른 길로 일행과 함께 광장을 떠났다.
시복식 행사를 마치고 다른 교우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교황을 지근거리에서 보았다는, 다시 말해서 알현(謁見)했다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되뇌어 보았다.
어떤 이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탈권위적 성향에 맞추어 ‘교황(敎皇)’보다는 ‘교종(敎宗)’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변함없이 교황이라고 불러 ‘알현’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비록 세속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요즘처럼 국·내외적으로 보다 강력하고 좀 더 권위적인 정신적 지주(支柱)가 필요한 상황 속에서는 교황이라는 중량감 있는 호칭이 더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나는 교황의 존재에 큰 기대와 신뢰를 갖지 않고 믿음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 뿐 아니라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교황의 존재로 인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이 한 단계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예언자의 역할이 필요했던 구약시대와 달리 오늘날처럼 기도로써 직접적인 교제의 길이 열려 있는 ‘은혜의 시대’에 교황이 신자들의 믿음생활에 꼭 필요한 존재일까 하는 의구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교황들의 동정과 발언에 대한 관심도 적고, 신자로써 그 분들의 교서(敎書)라든가 교황이 주재한 공의회(公議會) 내용 등을 알아보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 다른 신자들의 생각이나 자세도 이와 대동소이할 것이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의 역사적인 자진 퇴위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266대 교황으로 착좌하면서 교황이라는 존재가 가톨릭 사회는 물론 이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교황’이라는 직위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대두 때문이 아니라, 그의 교황 착좌를 계기로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매력과 그가 사목했던 모국 아르헨티나에서의 행적들이 가톨릭을 포함한 인류사회에 신선하게 어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긍정적인 차원에서 점차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적은 사실 따지고 보면 한 종교계 지도자로서 당연히 실행해야 하는 모범사례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추기경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든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사제관을 이용하지 않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기거했다든지 하는 것이 사목자로서 실행하기 어려운 사례는 아니다. 그것은 겸양과 청빈한 생활을 지향해야하는 사목자로서의 당연한 실천사항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이 된 이후에 보여 준 모든 일들 - 이를테면, 행사에 참석할 때 방탄차를 이용하지 않고 무개차를 타고 군중사이를 지난다든지, 수감된 죄인의 발을 씻어주고 친구(親口)하며, 교황청을 떠나 일반 주거지를 택해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재삼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최근에는 교황청 내에 노숙자들을 위한 샤워시설을 설치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는 바티칸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서 가히 혁명적인 조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토록 끊임없이 낮은 곳을 지향하는 그의 행적에 대해 쓴 책들이 이미 서점에서 넘쳐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마치 스코틀랜드 작가 ‘아치볼드 J. 크로닌’의 소설『천국의 열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서점가에 넘쳐났을 때처럼, 숭고한 사제의 전형으로 현시대에 우리와 함께 실재하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해 쓴 서적들이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명은 이상적인 가상 인물인데 반하여 또 다른 한 명은 현재의 실존인물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차이점은 ‘치셤 신부’는 끝까지 평사제로 남는데 반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다면, 그는 작아지고 낮아짐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번 방한 시에 사람들 앞에서 여과나 가감 없이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러한 행위들에서 가식이나 위선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이나 미디어를 통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사제, 주교, 추기경으로서의 사목단계를 거쳐 교황으로 로마에 입성한 이후 보여준 그의 모든 언행을 짚어 본다면 그러한 느낌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틈만 나면 그는 실천적인 선교를 강조했다. 과감히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핍박 받는 자들 편에 서서 싸우라고 역설했다. 심지어 교회의 규율을 강요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주력해야한다고 최근 직접 작성한 교황청 공식문서에서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일부 사람들은 그가 한 때 중남미의 가톨릭 사회를 흔들었던 해방신학(解放神學)의 원조로 오해를 하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도 그의 성향에 따라 한 때 해방신학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실제로 해방신학자들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그가 해방신학 신봉자가 아님은 물론 공산주의자도 아님이 다음의 글로 입증된다.
“사회주의, 즉 마르크스주의가 붕괴한 후 해방신학은 큰 혼란에 빠졌다. 오늘날 시대착오적으로 해방신학을 다시 들고 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이론의 수정이나 새로운 창조력을 상실한 채 무기력으로 연명했다.”
-친구 ‘구즈만 K. 레코르’의 저서에 써 준 서문(序文)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사랑은 하느님께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차원에서의 인간애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유물사관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의 폭력적인 사회변혁과는 애초부터 그 궤를 같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남미 가톨릭 사제들의 저항운동에 관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해방신학의 상징인 로메로 대주교의 일대기를 그린『로메로』와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을 상대로 원주민 인디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다 숨진 신부들의 활동을 그린 『미션』이 그것인데, 굳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향에 가까운 영화를 적시하라면 『미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높은 곳을 지향한다.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헤엄쳐 올라가듯 정신없이 위만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러니 병들고 지쳐서 물가에 밀려나 죽어가는 다른 연어가 보일 리 없다.
또한 사람들은 크고 귀한 것만을 추구한다. 그러니 작고 비천하고 가난한 존재들이 눈에 보이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혹자는 그러한 존재들을 그들의 삶의 군더더기쯤으로 여겨 핍박하고 배척한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삶의 자세를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지 그 지향점을 밝혀 주는 등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방한 시 우리나라에서의 의전용으로 가장 작은 차를 주문하고, 꽃동네의 중증뇌성마비 환자를 비롯한 장애인들을 일일이 포옹하며 입 맞추어 주고, 아시아 청년대회의 방명록 한 귀퉁이에 쉽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글씨로 서명을 했던 교황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저토록 거룩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토로했던 어느 개신교신자 네티즌의 글과 함께 나의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월호의 침몰을 계기로 드러난 많은 후유증과 합병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세월호 사고는 몇 개월 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곪아온 사회의 온갖 병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할 뿐이다. 세월호보다 더 큰 사건, 사고가 언제, 어떤 형태로 다시 발생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 사회 전체가 욕심과 타락의 과적으로 인하여 복원력을 잃고 침몰해 가는 거대한 세월호가 아닐까 하는 그 점이다. 선장과 선원들이 도망쳐버린 배에서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애타게 손을 허공에 흔들면서…….
그것은 내가 그 날 광화문 광장에서 본,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하여 손을 흔들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다. 사람들은 그 때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교황님, 침몰해가는 우리나라와 이 사회를 구해주세요,’라고.
만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외침을 들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마도 2004년, 60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죽고 다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크로마뇽 클럽의 대화재 5주년 기념 미사에서 행한 강론을 반복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한민국)는 아직 더 울어야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한민국)는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한민국)는 일하고 아첨하고 돈 버는데 골몰하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신경 쓰느라 더는 여기에 없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