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2일 성령 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2011. 6. 12. 오전 7: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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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2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사도행전 2,1-11

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제2독서 1코린토 12,3ㄴ-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복음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저 어렸을 때에는 머리 이발을 하기 위해서는 꼭 이발소에 갔었습니다. 제 어머니가 미장원이 훨씬 예쁘게 자른다고 데리고 가려고 하면 도망 다닐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이발소, 여자는 미장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이발소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색합니다. 남자들도 대부분 미장원에서 이발을 하며, 또 워낙 이상한 영업을 하는 이발소가 많다보니 이발소에 들어가는 저를 수상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쇼핑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대부분 자매님들로 가득한 슈퍼마켓에 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남자 체면을 깎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 말고도 다른 형제님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시식 코너도 꼭 들려서 맛을 보는 등 오히려 쇼핑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예전에는 어색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혼자 극장가서 영화 보는 일, 혼자 식당에서 식사하기, 자매님들로만 가득한 곳에서 강의하기, 몸에 착 달라붙는 쫄쫄이 옷을 입고 자전거 타기 등등……. 처음에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어색한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겪는 부끄러움과 어색함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별 것 아닌 것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열등감, 자신 없는 모습들을 과감하게 벗어 던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열등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앞으로 헤치고 나아가는 자신감 넘치고 포기하지 않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지요.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모든 자신감을 잃어서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전해주셨고, 그 결과 그들은 서로 통교를 하며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감 없이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우리들은 더 큰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의 등불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 어둠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다.(탈무드)



희망은...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의 참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쥐 한 마리를 캄캄한 독 속에 집어넣으면 3분을 넘기지 못하고 죽지만, 그 독 속에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가면 적어도 36시간은 죽지 않고 견디어 낸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희망은 죽음 앞에서도 생명을 지켜내게 하는 강한 힘이라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희망을 저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기사들을 얼마나 많이 접하게 됩니까? 그러나 세상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부랑자와 빈민들을 위해 평생을 산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는 “어떤 이들이 자살하는 지경까지 가는 것은, 그들에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핍된 것은 사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만이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러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 익숙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보다는 세상에 희망을 뿌릴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먼저 받기보다는 먼저 주는데 익숙한 사랑의 실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댓글 1

  • 2011년 6월 13일 오전 11: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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