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한용운 - 사랑의 시인, 민족의 시인, 구원의 시인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
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
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
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
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
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내 노동으로> 신동문 - 삶을 통한 시의 완성
내 노동으로
오늘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
<풀> 김수영 - 앞을 향하여 달리는 살아 있는 정신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돌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도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