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계의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부르심과 사명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CHRISTIFIDELES LAICI
차 례
서 론
제 1 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제 2 장 한 포도나무의 모든 가지들
제 3 장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도록 내가 너희를 내세웠다
제 4 장 주님 포도원의 일꾼들
제 5 장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주교들에게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남녀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모든 평신도에게
서 론
1.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들은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 1987년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20년을 지낸 교회와 세계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그 주제로 다루었는데, 평신도들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의 일꾼들로 표현된 하느님의 백성에 속하고 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마태 20,1-2).
복음의 비유는 우리 눈앞에 주님의 광활한 포도원과 그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되는 많은 남녀 일꾼들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포도원은 온 세상이다(마태 13,38 참조).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내림이라는 전망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꾸어져야 할 세상이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2.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마태 20,3-4).
저 먼 옛날부터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하시는 주 예수님의 부르심은 전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들려 오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들어,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오순절의 새로운 성령 강림 안에서 자신의 선교적 본질을 더욱더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으며, “구원의 보편 성사”1)로서 이 세상에 자신을 파견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거듭 듣고 있다.
당신들도 가서 일하시오. 이 부르심은 다만 사목자나 성직자, 남녀 수도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평신도들 또한 개인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께 교회와 세계를 위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는 가운데 이 사실을 상기시키며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설명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 태도를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참으로 주님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또 내가 과연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숙고하여야 합니다.”2)
공의회는 특별히 그 풍부한 교의적, 영성적, 사목적 유산을 이어받아 평신도의 본질, 존엄성, 영성, 사명과 책임을 전혀 새롭게 기술하였다. 그리고 공의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반향하여, 모든 남녀 평신도를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불러 내었다. “거룩한 공의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평신도에게 간청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와 성령의 인도에 기꺼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즉각 응답하기 바란다. 특히 청소년들은 바로 여러분을 향한 이 부르심을 넓은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주님께서 친히 이 거룩한 공의회를 통하여 모든 평신도를 거듭 부르시며, 평신도들이 날로 더욱 친밀하게 주님과 결합되어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필립 2,5 참조) 주님의 구원 사명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찾아 가실 모든 도시와 장소에 새로이 평신도들을 파견하신다(루가 10,1 참조).”3)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1987년 10월 1-30일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동안, 이 말씀은 영적으로 다시 한 번 들려 왔다. 공의회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그리고 교회 전체의 많은 사람들과 공동체들이 지닌 체험의 빛을 받아들이며, 이전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들에서 경험을 쌓았던 교부들은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또 폭 넓게 다루었다.
주교들의 이번 모임에는 훌륭한 남녀 평신도 대표들이 참석하여 회의 진행에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이는 폐막 미사 강론에서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우리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평신도들(남녀 참관인들)의 참여를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의의 토론 과정에서 우리가 초대한 세계 각국과 여러 지역의 평신도 대표들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었고, 협조하려는 사랑에서 우러나온 그들의 체험과 조언 그리고 제안들에서 결실을 거둘 수 있었기에 우리는 한층 더 기뻐하였으며, 이에 감사를 드립니다.”4)
공의회 이후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시노드 교부들은 성령께서 교회의 젊음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수많은 평신도들의 참여와 성덕을 향한 열망을 얼마나 북돋워 주시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다른 여러 방법들 가운데서도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협력의 새로운 방식으로 입증되고 있다. 곧 전례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교리교육에의 적극적인 참여, 평신도들에게 맡겨지고 또 완수되는 다양한 봉사와 임무, 단체나 협회와 영성 운동들의 발흥은 물론 교회 생활에 대한 평신도들의 활기찬 투신, 그리고 사회 발전을 위한 여성들의 더욱 충만하고도 뜻깊은 참여 등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공의회 이후 평신도들의 길에는 곤경과 위험이 없지 않았음을 적시하였다. 특별히 평신도들이 자주 피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유혹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 유혹의 하나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봉사와 임무에 지나치게 강렬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전문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분야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유혹은 신앙과 생활의 부당한 분리, 곧 복음의 수용과 현세와 현시대의 다양한 상황에서 수행하는 활동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그 토론 과정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끊임없이 참고하였다. 평신도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은 스무 해가 지난 다음에도 놀라운 현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예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가르침은 오늘날 새로운 상황에 제시되어야 할 응답을 밝혀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사실, 시노드 교부들이 떠맡은 과제는 공의회가 표명하였던 평신도 신분에 관한 이 풍부한 “이론”을 교회의 정통 “실천”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일부 상황은 그것이 지닌 어떤 “새로움”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적어도 연대적으로는 이른바 공의회 이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하여 시노드 교부들은 당연히 그 토론과 반성의 과정에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서, 현재와 미래에 평신도들에게 맡겨질 직무와 교회 봉사, 새로운 “운동들”과 더불어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여러 가지 단체들의 성장과 확산,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등에 관련되는 문제들을 상기할 수 있다. 커다란 열의와 역량과 도량으로 진행된 그 회의를 마치고, 시노드 교부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본인에게 알리며 적절한 시기에 평신도 문제에 관한 결론적인 교황 문서를 전세계 교회에 제시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5)
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는 ‘의제 개요’(Lineamenta)에서부터 ‘의안’(Instrumentum Laboris)에 이르기까지, 준비 보고서에서부터 개별 주교들과 평신도들의 발언 그리고 시노드 회의장에서의 토론 요약 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소그룹” 토론과 그 보고서에서부터 최종 “건의안”과 폐막 “담화문”에 이르기까지,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풍부한 모든 노력을 참작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 문서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대비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충실하고도 일관된 표현이며 단체성의 결실이다. 그러하기에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위원회와 사무처 자체에서 이 문서의 최종 마무리까지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모든 평신도가 한 집단으로서든 개인으로서든 교회의 친교와 사명 안에서 받은 은사와 책임에 대한 더욱더 깊은 의식을 일깨우고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이 권고의 목적이다.
현대 세계의 절박한 요구: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3. 이번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근본 취지와 가장 바람직하고도 귀중한 결실은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주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평신도들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며, 특별히 제3천년대의 문턱에 들어서는 역사의 이 위대하고도 극적인 순간에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능동적이고도 역사적이며 책임 있는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생활의 새로운 상황은 특별히 평신도들의 행동을 절실하게 촉구하고 있다. 무관심이란 언제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은 더욱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는 무관심은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읽고 있는 복음의 비유는 이렇게 계속된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6-7).
주님의 포도원에서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아 빈둥거릴 여지가 전혀 없다. 한층 더 절박한 목소리로 그 “주인”은 당신의 초대를 되풀이하고 계신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주님의 목소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분명하게 들려 오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신앙과 그리스도교 입교 성사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동화되며, 살아 있는 지체로서 교회와 한 몸을 이루고, 교회의 구원 사명에 있어서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주님의 목소리는 또한 교회와 인류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들려 오고 있다. 공의회는 우리에게 이를 상기시켜 준다.
“하느님의 백성은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성령께 인도되고 있음을 믿는 그 신앙에 따라, 현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사건과 요구와 염원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진정한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 내려고 노력한다. 신앙이야말로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밝혀 주고 인간의 소명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주며, 따라서 참으로 인간적인 해결로 마음을 이끌어 준다.”6)
그렇다면 그 많은 문제와 가치, 불안과 희망, 좌절과 성공을 안고 있는 우리의 이 세계를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에 제시된 공의회의 진술에 비추어,7) 그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사건들이 수많은 문제들과 중대한 난국을 야기하고 있는 이 세계를 직시하여야 한다. 아무튼, 이 세계는 포도원이다. 이 세상은 평신도들이 그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부름 받은 영역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바라시는 그대로 평신도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마태 5,13-14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세상”과 “세계”의 현실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황과 문제들은 참으로 복잡 다단하며 급속히 변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지나친 일반화나 단순화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부각되고 있는 일부 경향들을 주목할 수는 있다. 가라지와 좋은 씨가 농부의 밭에서 함께 자라났다고 복음은 전한다. 그것은 역사에도 들어맞는 옳은 말이다. 일상 생활에서도 흔히 인간 자유의 행사에 모순이 있게 마련이고, 역사에는 선과 악, 불의와 정의, 고뇌와 희망이 나란히 때로는 밀접하게 뒤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속주의와 종교 욕구
4. 한층 더 다양한 형태로, 특별히 널리 만연되고 있는 세속주의의 형태로 드러나는 종교적 무관심과 무신론이 점증하는 현상을 누군들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속적인 과학 기술 발전의 인상적인 개가가 미친 역효과로 인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우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새로운 유혹, 곧 무한한 자유의 행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같게 되기를 바라는 유혹(창세 3,5 참조)에 이끌려, 사람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서 종교적 뿌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단순히 하느님이란 자신의 삶에 전혀 무의미하다고 여기거나 또는 철저하게 하느님을 배척하며, 현대 세계의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세속주의 현상은 참으로 심각하다. 단순히 개인만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모든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공의회는 이미 이렇게 지적하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 실천에서 멀어지고 있다.”8) 다른 기회에 본인도 오랜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을 덮치는 비그리스도교화 현상을 누차 상기시켜 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끊임없는 재복음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욕구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양심 안에서 인간 실존의 더욱 심각한 문제들─특별히 인생의 목적과 고통과 죽음에 관한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될 때에 그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이 진리의 말씀을 주저 없이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9)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의 세계는 또한 더욱 광범위하고 활기차게 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정신적이고도 초월적인 인생관에 대한 개방성, 종교적 탐구에 대한 새로운 관심, 신성과 기도에 대한 의식의 회귀를 통하여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유의 요구를 통하여 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인간: 침해당하고 또 고양되는 그 존엄성
5. 우리는 더 나아가 수많은 인간 존엄성의 침해에 관심을 촉구한다.
하느님의 살아 있는 모습(창세 1,26 참조)인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인간은 한층 더 치욕적이고도 비열한 형태의 “착취”에 노출당하게 되며, 그러한 착취는 거의 틀림없이 인간을 더 강한 자들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만다. “더 강한 자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이념, 경제력, 비인간적인 정치 제도, 과학 기술주의, 범람하는 대중 매체 등이 그 이름이다. 일부 국법의 명백한 불의나 지나친 방임 때문에 그 기본권이 침해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는 바로 우리 형제자매들인 그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그 기본권이란 생명에 대한 권리와 신체 보전에 대한 권리, 주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 가정과 부모의 책임에 대한 권리, 공공 생활과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 양심의 자유와 종교 실천에 대한 권리이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살해되어 태어나 보지도 못한 아기들, 부모에게 버림을 받거나 혹사당하는 어린이들, 애정도 없이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나는 어린이들, 그 무수한 어린이들의 숫자를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어떤 나라에서는 전 국민이 주택과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절대 필요한 수단들이 없으며, 생존을 위한 필수품마저 없다. 육체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빈곤과 비참의 광대한 지역이 지금 이 순간에도 대도시들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집단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성함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 신성함이 얼마나 자주 격하되고 침해를 당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 확고 부동한 토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성함은 언제나 거듭거듭 회복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의미는 진지하게 숙고되어야 하고 또 강력하게 천명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더 깊이 깨달아 가는 유익한 경향이 진전되고 또 지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파고들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용될 수 있는 “사물”이나 “객체”가 아니라 본래 양심과 자유를 부여받은 책임 있는 주체이다. 인간은 사회와 역사 안에서 책임을 갖고 살며 정신적이고도 종교적인 가치들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부름 받은 주체이다.
우리들의 시대는 흔히 “인도주의” 시대로 운위되어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무신론이나 세속주의의 일부 형태는 인간을 위축시키고 소멸시켜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반면에 인도주의의 다른 형태들은 그 자체가 우상 숭배가 되어 버릴 정도로 개인을 고양한다. 그렇지만 진리에 부합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인도주의가 있다. 개인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올바로 인식하는 이 인도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존엄성을 천명하고 지탱하고 강화한다.
인도주의를 향한 이러한 경향의 징표와 그 성과는 증대되는 참여의 요구이다. 이는 분명히 현대 인류의 독특한 특징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는 진정한 “시대의 징표”다. 그 무엇보다도 여인들과 젊은이들의 참여 요구, 가정 생활과 학문 생활만이 아니라 문화, 경제, 사회, 정치 분야에서의 참여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의 주역이 되고, 어느 모로든 더욱 인간적인 새로운 문화의 창조자가 되겠다는 것이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 전체의 요구이다.10)
분쟁과 평화
6. 마지막으로, 우리는 현대 인류에게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또 다른 현상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상 전대 미문의 현상으로서, 인류는 일상적으로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수많은 형태를 지닌 현상으로서, 사고 방식과 창의력의 타당한 다원성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개인간, 집단간, 계층간, 국가간, 국가 집단간의 치명적인 대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폭력과 테러와 전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는 현대 인류의 다양한 분파들은, 자기 네의 “전능”을 드러내 보이고자, 혼란과 투쟁과 분열과 억압을 만연시키는 “바벨 탑”(창세 11,1-9 참조)의 건설이라는 부질없는 체험을 새삼스럽게 거듭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 가족은 스스로 비참하게 몸부림을 치며 상처를 입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의 안에 있는 평화의 무한한 선에 대한 인류의 저 갈망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이 그 갈망을 체험하고 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9)는 복음의 행복 선언은 우리 동시대인들 안에서 새롭고도 뜻 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또 고통을 당하며 살아간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집단들의 사회 생활 참여는 점차 평화의 소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추구되고 있다. 이러한 길에서 우리는 사회, 정치 분야에 헌신적으로 투신하는 수많은 평신도들을 만난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제도 속에서 일하며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에게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희망
7. "주인"이 당신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파견하신 일꾼들 앞에 펼쳐지는 일의 영역은 방대한 것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교회가 현존하고 일하며, 목자들과 신자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인 우리 모두가 일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한 곤란한 상황들이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역경들이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활동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결코 교회를 쳐부수거나 정복할 수는 없다. 성령께서 교회에 생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완수하도록 교회를 지탱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한계와 죄로 인하여 그리고 악의 세력으로 인하여 야기된 온갖 곤경과 지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친교와 참여를 위하여 기울이는 모든 역량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입 안에서 완전한 해답을 발견한다는 것을 교회는 알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11)로서 자신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어려움에도, 인류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인류는 참으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살아 계시는 인격적인 복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기쁜 소식”이며 기쁨의 전달자이다. 교회는 날마다 그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이러한 복음 선포와 증언에 있어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다. 바로 평신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희망과 사랑의 표지요 원천으로서 세상의 모든 분야에 현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