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을 지킨다는 것이...

2009. 8. 31. 오전 8:21:42

글자

 어떤 친구가 이곳에 와 봉사하는 것을 보고 싶다 할까? 궁굼하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목표만 정해지면 그 방법은 우리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걱정한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채워주시니 말이다.  믿음의 단계에 따라 우리의 궁금증은 다양한 것이 아닌가? 손가브리엘 형제가 친구 한명과 함께 가도 괞찬으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저 심부름꾼인데 "예", "아니오"의 권한이 내게 있나? 밤 10시 30분에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금 시간이 밤 10시 50분. 아직 소식이 없다. 못 온다는 연락이 없으니 오는 중이 겠으나 1차 봉사의 시간이 밤 11시 부터 시작이고 하느님과의 약속시간이니 그시간을 늦출수는 없다. 왜 아직 안 올까? 여러 가지 걱정이 지나간다. 오는 발거음을 주님의 천사가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나 혼자만이라도 봉사해야겠다고 하고 나갔다. 오늘은 왜 혼자만 왔느냐고 안부를 묻는다. 이것 저것 걱정을 해주면서...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아직도 연락이 없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 가부를 물어 보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한다. 내가 소심해서 그런지 아니면 상대방을 염려해서 그런지 나도 헷갈린다. 분명 나는 후자를 염려해서 하는데도 그 전자가 미화돼서 감추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곳 상황이 특수(시간,장소,대상)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떳떳하게 좋은 몫중에 한곳 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현실은 쉽게 결정하기에 주저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정쯤 내가 막 2차 봉사를 하려고 짐을 꾸리고 있는데 전화 연락이 왔다. 0시 30분쯤 도착될 것이라고. 안심이 되었다.

이 손가브리엘 형제가 이곳에 봉사한지도 9월 첫주면 만 3개월이 된다. 주님의 소개로 만나 함께 봉사를 하고 있으나 아직 젊은 나이에 이곳에 흔쾌히 봉사를 한다는 것이 주님의 역사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열정은 시련을 맞게 되고 마음은 아직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행동이 조금씩 굼뜨기 시작한 것을 알았을 때는 처음 길에서 한참을 빗겨간 상태이다. 이 형제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세상적으로 지각하는 회수가 더해진다. 한창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적극적이고 왕성한 의욕을 보일 때 이 봉사와 맞물려 동시에 함께 한다는 것이 주님의 특별한 축복인 동시에 시험인 것이다. 그 틈을 어둠은 놓칠 이유가 없다. 반드시 너를 무너뜨리리라. 우르렁거리며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사자와 같이. 이시련은 혼자의 힘으로서 외롭게 뚫고 넘어가야할 담벼락이다.

나는 그저 기도로 도와 줄 뿐이고 단지 당신 뒤에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그 믿음만을 심어주면서 용기를 줄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어둠이요 하고 달려오면 누가 거기에 시험이 들까! 가장 천사같고 둘도 없는 애인같이 다정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다가오고, 이번만은 하면서... 하고, 이렇게 주님의 식별의 은총이 없으면 누가 거절하리요!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 참으로 깨어 있어야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가지 주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은 이 형제로 하여금 나를 견진의 대부로 부탁하게 한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이 봉사를 놓게 할 수 없는 끈이 되었음을... 그래서 은총의 충만함일 때 입을 조심하라고 한부로 서약하였다가 돌이킬수 없는 주님의 종이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떤 담이라도 뛰어 넘을 수 있고 나의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사옵니다.(시편18,29: 옛성서)

댓글 1

  • 2009년 8월 31일 오전 10:58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안에서 믿음과 희망을 보는 듯 합니다. 쉿!!! 말씀은 곧 그분이시니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