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체험으로 2006년 여름 신학원 1학년 때 안동교구 가은 성당 상신원 공소에서 지냈습니다.
권혁주 주교님께서 인도해주신 교육을 받고 나환우 촌인 상신원에서 함께 일주일 보냈던 동기가 이원희 엘리사벳입니다.
함께 가고 싶은 이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쳐진 나랑 잘 지내라고 둘을 묶어 놓았다는 후문이 있는 동갑내기입니다.
올해 우리는 지공여사(지하철 공짜)가 되었습니다.
서울 음대를 나와 미국에서 성악공부를 하다 연극으로 방향을 전환한 끼많은 친구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재작년에는 가시세비낭, 지난해는 서울 할망 정난주 공연을 이번에는 대학로에서 한답니다.


어두운 삶, 구치소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연극배우 이원희 엘리사벳 (교리 48)
햇빛 찬란한 계절, 여름.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선교사를 만날 것인지, ‘울림이 있는 사람들’ 첫 번째가 나간 뒤부터 내내 고민했다. 힘겹고 고통스런 삶을 보듬는 것, 그것이 선교사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어두운 곳.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절망적인 삶이 가득한 장소여서 누군가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든 곳에 우뚝 서있는 선교사를 만나고 싶었다. 구치소!
교정사목을 했던 선배님을 수소문했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여기 저기를 헤집다 우연히 정말 가까운 곳에서 이원희 엘리사벳 선배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신학원 1학년이었을 때 성서영성학과를 다니며 축제 때 성가 지휘를 하던, 성악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활동 하셨다던 그 선배님을 교정사목과 연결 지어 만나게 된 것이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선배님이 가장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눈빛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만난다는 것일까…. ‘나오미의 노래’라는 모노드라마. 그것이 시작이었다.
기후변화 때문에 매번 적절치 않는 날씨를 맞닥뜨리곤 한다. 7월 초인데도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필 선배님을 만나러 피정집에 가는 날 말이다.
비가 억수로 내린 그날
첫 번째 전화에 흔쾌히 응해주시면서 만나자고 했던 장소가 성북동에 있는 ‘복자사랑 피정의 집’이었다. ‘이 선배님, 하시는 일만큼이나 좀 독특하시다.’싶었다. 다행이 피정의 집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고 멀리 보이는 검푸른 숲이 나를 좀 비장하게 만든다.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하나….
'복자사랑 피정의 집' 모습과 멀리 보이는 성북동 성곽 쪽 모습
인기척이 없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들어가본다.
“한 둘 셋 한둘/ 한 둘 셋 한둘/ 한 둘 셋, 한 둘 셋, 한 둘 셋 한둘/엎어 치고, 엎어 치고, 뒤 집고, 엎어 치고…”북소리와 함께 아래 배에서 나오는 묵직한 장단 맞추는 소리. 한 면이 모두 거울로 돼있는 연습실인데 거기서 소리에 맞춰 선배님이 북을 치고…. 오늘 첫 번째 강습을 받는 날인데, 보통 사람이 두 세 달을 꼬박 연습한 것만큼 잘 한다고 강사의 칭찬이 대단하다. 나는 속으로 ‘선배님 재능을 잘 모르시나 보다’하고 한쪽 귀퉁이에서 피식 웃는다.
피정의 집 연습실에서 북을 치는 선배님
강습을 마치고 선배님 집으로 따라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선배님과 같은 본당에 다니고 있고 10여 년이 넘게 선배님을 봐왔다. ‘알아 왔다’도 ‘친했다’도 아니고 그저 봐온 거다. 처음, 밝은 갈색 빛 나는 머리를 멋지게 풀어 넘기고 주황색 원피스를 입은 화려한 자매가 성전 의자에 자유로운 포즈로 앉아 있는 모습을 봤었다. 우리 나라 보통의 자매님들과는 뭔가 분위기 다른. 그 자매가 이원희 엘리사벳 선배님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선배님도 어지간히 변했다 싶다. 나도 마찬가지겠지. 선배님의 말투도 꽤나 걸쭉해져서 좀 더 편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또, 선배님은 막힘 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신다. 연극배우시니까. 그런 대화를 그대로 옮기기로 맘 먹었다.
‘나오미의 노래’
-시작은 어떻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어. 신학원을 졸업하고 교정사목 하던 본당의 어떤 자매가 ‘언니, 구치소에서 합창단 만들어 노래 좀 하세요!’했던 이 한마디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한 거야. ‘나오미의 노래’라는 모노드라마와 몇 개의 성극(聖劇)으로 제주도를 포함해서 전국의 구치소 50여 군데에서 공연했어.”구치소가 전국에 7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 말이지요.
“응,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시각으로 룻기를 해석해서 하느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지. 처음, 평신도협의회 단체가 어떤 행사를 기획하면서 30분 연극을 하래. 그래서 대본도 쓰고 연기했지. 한데‘나오미의 노래’라는 성극을 준비하게 된 데에 또, 우연 같은 상황이 있어. 신학원에서 백운철 신부님께서 신약 강의를 하시잖아, 한데 그 신약 시간에 신부님께서 문득 구약의 룻기를 언급하시는 거야. 이 희망의 메시지를 연극으로 하면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 나는 그걸 노트에 ‘룻기-연극으로 할 것-희망의 메시지’라고 적어 놓았고. 어느 날 그걸 다시 본거야. 그렇게 해서‘나오미의 노래’가 나오게 됐어. 내가 룻으로 나오기에는 나이가 좀 그렇지! (웃음)
-궁금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웬걸, 거기 있는 사람들 눈이 바른 놈이 없어, 우리가 보통 다닐 때 보는 눈이 아니야. 처음 나를 볼 때도, 네가 뭘 하겠어 하고 우습게 깔보는 눈빛. 그리고 내가 여자지, 그 이상하고 야릇하게 보는 눈빛! 그렇지만 나도 만만치 안잖아, 구치소에 들어가면 어떤 줄 아니? 우선 철창이 열리고 내가 들어간다, 그러면 그 철창이 덜커덕 닫혀! 그런 후에 다시 앞에 있는 철창이 끼익 열려서 내가 그 다음 구역으로 들어가, 그런 식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원래 구치소에는 문이 동시에 두 개가 열리면 안된데. 그 분위기 한 번 상상을 해봐!
그렇지만 내 나이가 예순셋. 지금껏 살아온 내가 그런 눈빛?분위기에 움츠러들겠니? 한데 일단 연극이 시작되고 5분~10분이 지나면 흉흉한 눈빛으로 키득대던 사람들이 분위기가 달라져요. 때론 눈빛이 촉촉해지기도 하고. 그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말씀 드려 ‘이 일이 당신 일이 되게 해주세요!'”
배우로 살다 배우로 가야지
-‘노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배우시네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배우하고 싶었는데 집안 반대가 심했어. 공부는 좀 했지.
그 즈음 아버지 사업에 문제가 생겼고. 학비가 싸면서 문과대였어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성적이 안 나왔고 그래서 서울대 성악과를 택한 거야. 입학 전형이 지금 같지가 않았어. 학교에서는 할 수 있는 역량을 본거지. 그렇게 해서 노래를 했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더하고 거기서 내 나이 마흔 다섯 살까지 무대에 섰어.” 선배님은 미국에서 맨하탄 음대 수료하셨다. 시창청음 한 과목에서 점수가 안 나와‘수료’라고.
‘시창청음은 악기의 도움 없이 악보를 보고 정확히 노래할 수 있고 음을 듣고 악보에 적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 마흔 다섯 이후가 궁금해집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었던 연극을 위해서 준비를 하게 됐고 동국대 대학원 연극 영화학과에 들어 갔어. 그때 두 명을 뽑았는데 경쟁률이 대단했단다.(웃음)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연기를 더 배웠고 계속해서 무대에 서다 신학원에 들어온 거지. 나하고 같이 연극 공부했던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해서 자리를 충분히 잡질 못했어. 그래서 여전히 고전하고 있고 나도 도움을 못 받는다. 지금 연극하면서도 기획, 대본, 연기, 재원 조달까지 내가 다 하는 경우가 많아. 벅찬 일이지. 하지만 배우가 연기하지 않고 그냥 있는 시간은 더욱 견디기 힘들어. 배우로 살다 배우로 가야지.”

인터뷰 중에도 계속 분주하게 연극인들과의 전화가 이어진다
-본당에서 활동은.
“성가대에서 노래해. 40여 년을 성가대를 했어. 주님께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빠진 적도 없고 으스대는 마음이나 생색 내는 마음도 없었고, 평일 연습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굳이 연습까지 가냐고? 거기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 성가대는 내게 마음 편한 걸 베풀어 준거지. 어떤 때는 지휘자가 못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지휘도 해주고.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하는 거야.” 최근 9월에 있을 연극 준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가대를 쉰다고 한다.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다.
성북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선배님께서 하시는 일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처음 얘기를 시작할 때 ‘요즘 뭐하고 사세요?’ 이런 질문으로 시작했었다. 그러자 바로 “나 요즘 글 쓰는 거한다. 가톨릭신문에 내 글 나오는데 봤니?” 하신다. 알고는 있었지만 일부러 찾아 읽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글로 인해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배님은 가톨릭신문에 올 5월 12일 자부터 ‘일요한담’이라는 코너에 계속 글을 게재하고 있다. “신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다 신앙이 굳은 분들인데 나까지 뭐 거기에 말을 덧붙이겠니? 제목이 ‘한담’이잖아, 나는 신변잡기들 쓴다. 글이 매주 나가고 딱 정해진 양이 있어서 꽤 신경이 쓰여.”신학원을 오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탁자에 놓인 노트북을 펼쳐서 뭔가를 보여주신다. 그 내용을 ‘일요한담’에 ‘왼쪽 귀때기’란 제목으로 게재했었다고. 몇 대목을 옮겨 본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중간 생략) 여자 둘이 하얀 작은 가위로 내 오른쪽 귀를 세게 잡아 당겨 자르기 시작했다. 가위는 아주 잘 들어서 귀는 삭둑삭둑 연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두 여자는 빨간 피가 테를 두른 내 귀를 “말도 안 들리는 귀때기 두 개나 달고 있으면 뭐 하네” 그러면서 얼굴에 탁 던졌다. 나는 헉 하고 일어났다. 오른쪽 귀가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났고 겁나서 차마 만져볼 수도 없었다. 아직 붙어있는 귀를 꽉 잡고 사정사정 했다. “갈게요, 가요, 가면 될 거 아녜요!” 당장이라도 두 여자가 다시 나타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 왼쪽 귀때기, 마저 자르자우”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신학원에 간 사람은 그 학교 50여 년 역사에 나밖에 없을 게다.’이렇게 해서 신학원에 입학했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씀하신다. “우리 거기서 너무 행복했잖니? 서로 사랑하면서.”
글에서도 마지막에 이렇게 마무리 하신다. ‘뭐가 뭔지는 몰랐어도 그 안에서 참 행복했었으니 말이다.’우리들 모두가 그 대목에 공감하는데 바깥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눈을 지그시 뜨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우리들을.
가톨릭신문 ‘일요한담’ 중 ‘왼쪽 귀때기’
선배님은 ‘귀때기’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미국에서 선배님의 스승이 했던 말, ‘너는 왜 너의 관객을 위해 노래 하
지 않니?’ 그 얘기를 듣고 성악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많은 걸 생각했었
다고. 또 이렇게 이어간다.“듣는 귀가 어두운 거지. 하느님 말씀을 늦게 알아
들었어. 그래도 지금은 많이 알아 들어. 지혜를 주셔서. 늘 그런 생각을 했어. 오늘의 내가
나의 마지막 모습은 아니야.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나을 거야.’오늘의 내 모습에 자긍심
을 못 느꼈던 거지. 지금은 그런 생각은 안 해. 1~2년 됐어. 하느님이 애초에 가
진 나에 대한 청사진을 생각하면서 많은 걸 알아 듣기 시작했고 나의 한계를 알게 됐어. 그
한계를 만나고 싶지 않지만 그걸 안 순간부터 비로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 내 한계를 보면
서도 나를 야단치지 않고 측은해 하지도 않고 ,자괴감이나 자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축복이고 그러면서 지혜가 생기기 시작한 거지.”이어서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말씀하신다.‘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자기의 노고로 먹
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뮤지컬 공연과 뮤지컬 지도를 할 것
-9월에 성극이 한 편 무대에 오른다고.
“많이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생애를 그린 성극 뮤지컬인데 제목이 ‘가시세비낭 (세비낭:찔레나무의 제주 방언)이야.”줄거리는 ‘남편 황사영은 능지처사 되고 한 점 혈육 젖먹이 아들은 추자도의 노비로, 사대부 부인이었던 자신은 제주목 노비로 전락한 참혹한 현실을 ‘어지신 천주님의 어지신 뜻’으로 받아들이고 37년 간 노비의 삶을 살아 낸 정난주 마리아의 죽음보다 짙은 순명의 이야기이다. ’이 성극에서 선배님은 연기뿐만 아니라 이 연극을 처음 기획해서 대본까지 직접 쓰셨다.
-‘교정사목’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지만, 계획이 있는지.
“‘김천소년교도소’에서 연말에 뮤지컬을 한다는데 거기서 아이들 연기? 노래 지도를 할거야. 애들이 십대 때 가장 말 안 듣지! 한마디로 안 참고 지 맘대로 하는 거야. 한데 간혹 어떤 애들은 내 손목에 있는 묵주를 보고 ‘묵주지요?’하고 알아보는 녀석이 있어. 마음 한구석에 신앙 생활했던 경험이 자리하고 있는 거지. 애들이 뮤지컬을 하면서 뭔가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면 좋은 거겠지.”
선배님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고 하셨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음악 프로듀서로, 작은 아들은세계를 무대로 한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한다고. 두 아들이 스무 살이 안된 어느 때에
나누던 대화를 들려 주신다. “작은 녀석이 피아노를 실컷 연습하고 땀을 흘려서 얼굴이 하
얗게 돼 와서는 형하고 얘기하는 거야.
작은 녀석 : 이렇게 실컷 연습하니까 속이 후련하네!
큰 녀석 : 맞아, 음악이 그래서 좋은 거야.
작은 녀석 : 우리가 음악 하는 것 럭키한 거야?
큰 녀석 : 당연히 럭키지. 내가 음악 해서 사람들이 내 음악 듣고 좋아하고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작은 녀석 : 내 음악을 듣고 좋아하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큰 녀석 : 그렇게 될 거야!”
선배님이 딱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선배님 또한 사랑이 많은 세상이 되기를 희망하시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렀어도 지워지지 않고 연극의 한 장면처럼 기억하시는 걸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왜 이렇게 기니? 빨리 하고 밥 먹으러 가자!’하시며 재촉하신다. 얼추 얘기가 끝났다 생각이 들면서, 일어나 방을 여기 저기 둘러 봤다. 큰 종이에 적어서 벽에 붙여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주님, 지금 이 일이 당신의 일이 되게 해주십시오. 어머니께 저의 길을 맡기오니 주님의 뜻으로 바꾸어 주소서.’보면서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의 기도 공간
비 개인 늦은 오후, 먹음직하게 큰 사발에 담겨 나온 물냉면을 둘이서 면까지 추가해서 맛나게 먹고 헤어졌다. 미사 드리러 혜화동 성당에 들어가는 선배님 뒷모습이 자못 씩씩하게 느껴진다.
글. 사진 김소영 수산나
가톨릭 교리 신학원 총동문회 카페에서 퍼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