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 -심심한 사람만 보세요~ ^6^;;

2009. 8. 30. 오후 3:25:18

글자

37년늦은 후회님이 2006/03/03 19:54:04에 올려주신 글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상하셨다...
그리고 싹싹하시지만 급하셨다.

그러나 우리한텐 엄마같은 아버지 였지...
엄마보다 우리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서
항상 우리는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잔소리도 듣고
.....

그래도 아버지는 항상 웃는 모습만 떠오른다.
.....

오늘 김은영이 학교에 다녀 와서 저녁에 미사를 바친다고
우리들은 각자 있는데서 기도나 바치라고...
우리집의 "성직자" 대리가 있어 의존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막내 숙영은
기억할 일이 많이 있으려는지... 기억이나 할까?
네째 화영이도 아버지의 염려를 한몸에 받으며
아버지 무릎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무릎은 따뜻했니?


나는 엄마도 없이 항상....외할머니하고 아줌마들이나
시골에서 온 친척들이 돌봐주고...
어린이 날은 그래도 아버지가 영화관에도 다리고 가시고
화신백화점에서 양식도 사 주셨는데....


엄마는 아버지 하고 데이트 할때 노상 아버지가 혼자서
저만큼 빨리 걸어 가시면 키가 작은 엄마는
부지런히 걸어 따라 잡으면 아버지는 꺽어지는 길에서
얼굴만 보이고는 또 어느새 저만치 휭 가버리신다고 했는데..

나를 다리고 다니실 때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잃어버릴까봐 한눈도 팔지 못하고
아버지 뒤만 따라 갔지만...돈암동에서 삼선교를 지나
"새찜"광고가 붙은 돌담길을 손잡고 가던 기억이나
혜화동 어디쯤인지... 돌산을 가면서 왜 그 돌들을
그렇게 깨서 파고있는지.... 그런것들을 돌길에 손잡고 가면서
설명해 주시곤 했으니 엄마보다는 오붓한 "데이트"를
했던게 아닐까....


김우영의 아버지 기억은 어떤걸까....
엄마는 우영이를 유난히 싸고 돌았었는데... 왜 였는지..
아버지와 엄마는 우영이를 사이에 둔 연적이었나?

엄마가 오랫만에(10년) 낳은 두째인데 또(又)딸이어서
아버지가 구박(!!)했어야 하는데.... 아닌거 같다.
내가 너무 애기가 신기해서 어른들 몰래 다리고 학교에
까지 갔었는데(친구들한테 자랑하러) 온 집안이 난리가 났고

내가 다리고 집에 오니 그때까지는 금지옥엽(?!)인줄
알았던 내가 완전히 "웬수"가 되어 있었다.
앓던 엄마가 낳은 애기라 그런지 애기도 작고 약해
어른들은 다들 불쌍하다고 우영이만 싸고 돌았다.


세째 김은영이는 6.25 전쟁이 터진 6월 25일에서 두달 후 8월 15일...
한참 전쟁이 막바지였을때 한 여름밤을 솜이불로 빛이 새지않게
빛뿐만 아니라 바람기 한줌 들어오지 못하게 모든 문을 가린
찜통같은 피난지 시흥의 "새말" 작은 시골집 방에서 태어났으니
예수님의 말구유 보다도 더 험한 출생이었다.

아버지는 만삭인 엄마와 우영이 옥경 언니(사촌)
그리고 일하는 아줌마를 시흥의 새말에 남겨 두고 혼자서
부산으로 가시면서(서울대학교) 곧 돌아 올테니
아기 잘 낳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었다.

그때의 이야기는 소설이다.
김은영이는 나때문에 저렇게 건강하고 씩씩한것만 알아두고
여기서 그 장황한 야기는 줄이며....
아버지하고 아마 제일 용감하게 맞서서 대결(?)한 용사일걸?


우리는 크면서 집에서 있었던 일들은 엄마와 보다는
아버지와의 에피소드가 더 많치 않을까.....

우리아버지는 아무튼 자상하시고
딸 다섯을 다 끔찍이 원하셔서 낳으신 분이다.
기다리지 않고 나온 딸은 하나도 없다.
물론 기다린 것은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지만...
보란듯이 아들 보다 훨씬 낳은 딸들이 다섯이나 나왔다.

아버지에게는 열아들 부럽지 않은 딸하나 하나들이니
우리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50명인 셈이다.

자... 그대들 다섯 딸들은 50인분의 아들 노릇을 할지어다.


-------------- 답 변 --------------

아버지...

시내에 나가 급하게 엄마를 찾아서 집에 돌아왔을땐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었다
눈을 감지 못하고 뜨신채로 .....
엄마는 아버지의 눈을 황급히 감겨 드렸다
그모습을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난후...내가 내아이들의
대학학비를 벌어보면서
아버지의 감지못하신 눈을 이해할수 있었다

딸만 주루루 낳고...키우시면서 그고뇌가 어찌했을거라는 ...
아버지의 그심정을 이해하게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을때가 52 이셨으니
지금의 내나이와 같다
딸들을 어떻게 탈없이 잘키울수 있을까...
아버지는 많이 걱정하셨을거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아버지 자신도 어찌해야할지 잘몰랐을거같다
그러는 아버지가
어린 내눈에는 참 변덕스럽게 보였었다

나이차이가 많은 큰언니는 공부때문에 서울에서 살았었고
우영언니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씩씩한 은영언니는 아마도 아버지의 가장 듬직한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은영언니 자신은 힘에 버거웠겠지만...
매를 맞으면서도 도망도 안가는 은영언니를
아버지는 분명히 원망하시기도 했다
나는 어릴적 "도망도 안가느냐..."하시던 말씀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눈을 감지 못하시던때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갔었다

아버지......
지금 우리들이 다 보이시나요?
이젠 우리를 기쁜마음으로 보시고 계시나요?
그렇게 걱정하며 사랑과 또 조급한맘으로 키우시던 우리가
세상 걱정,근심,험난함...다 헤치고..견디어내고 나서야
아버지를 이해하며 그리워 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고 계신가요?
우리가 너무 늦지 않았나요?

아버지...
나는 아직 아버지의 강아지 입니다

 

 

 

-------------- 답 변 --------------
12년 밖에 못주신 사랑이 안타까워
남은 긴세월 보호하질 못함이 안타까워
이세상을 떠나시는 순간까지 불러주시던 내이름

험악한 세상에서 힘들게 방황하던 어린딸을
지켜주지 못한 아픔이 간구가 되었을 아버지의
영원의 기도가 힘이 되어 내 삶으로 살아납니다

세상에서 못다한 자식사랑
천국에서 하나님과 쏟아주심을 매일매일 느낍니다
그날 다시 만날때 부끄럼없는 딸이 되겠읍니다

내가 부모가 되어 아버지를 기리며.....

-------------- 답 변 --------------

넷째와 막내의 글을 읽고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 김천수 교수님은
그대들, 다섯 딸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을
하늘에서 보시면서 흐뭇해하고 계실것 같구나.

아버지도 고생하셨지만
어머니도 이나라의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고 가셨다.

나는 그 모든것을 잘 보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단다.

이러하신 부모님들이 계셨기에

우리들 남여 10명은 얼마나 잘 살고 있느냐!!! 말이다.

봉영, 우영, 은영, 화영, 숙영 다섯 따님들.
강신표, 박종덕, 김진호, 박광규, Scott Hamilton Jr. 다섯 사위 남자들.

김천수 교수님 내외는 훌륭한 아들 다섯이 또 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들 열명의 남여 자손과 많은 외손자들을 보고 계시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

장인 어르신께 정례(불교식으로 부처님께 세번 엎드려 큰 절을 올리는 경건한 마음 가짐이 가미된 예의)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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