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에서 펌글

2005. 3. 28. 오전 7:31:24

글자


어떤 사람이 주일 아침에 그의 친구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어이, 친구 우리 오늘 골프 치러 가지 않겠나?”

“고맙네만 오늘 나는 성당에 가야 한다네.”

잠시 후,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런가? 나는 자네의 그 믿음에 정말로 감탄사가 나오네. 내가 그 동안 자네에게 주일 아침에 열여덟 번이나 골프를 치자거나 낚시를 가자고 했는데 열여덟 번 모두 거절당했네. 허헛 참! 그런데 말일세.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그 성당이라는 곳이 골프장이나 낚시터보다 훨씬 갈만한 곳은 못되는가 보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골프장이나 낚시터보다 훨씬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가장 친한 자네의 청을 거절하고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성당이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나에게도 함께 성당에 가자고 권해야 되는 게 아닌가? 나는 골프장이나 낚시터가 좋기 때문에 자네에게 열여덟 번이나 골프장, 낚시터에 가자고 했네. 하지만 자네는 단 한 번도 나를 성당에 가자고 말한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네요. 즉, 성당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왜 성당에 가야하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중요한 곳에 다른 이들과 함께 간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중요한 곳이라면 남들에게도 중요할 수 있는 곳인데, 왜 다른 이들에게는 권고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내가 겉으로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배려차원이라고……. 하지만 어떤 것이 진정한 배려일까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무덤 경비병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부활 소식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또 다른 현존의 소식이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지요. 하지만 그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빈 무덤의 원인을 제자들의 절도로 돌리지요.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활을 사소한 절도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현존의 중대한 표시가 되는 부활사건이지만, 자신들이 직접 제거했던 예수님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자기들뿐 아니라 남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이기심까지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자신 혼자만 간직하는 그러한 소식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배려한다는 의미로 성당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한다면 성당에 함께 가보자는 말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당신의 기쁜 소식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기쁜 소식의 전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다른 이에게 성당에 가보자는 말이라도 해봅시다.

댓글 2

  • 2005년 3월 28일 오전 8:30

    ...

  • 2005년 3월 29일 오전 8:07

    이크, 제 얘기를 하시는군요...권할 생각을 왜 못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