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 모음

2007. 3. 3. 오후 2:44:22

글자

제비꽃 -류시화-

수레를 타고 가는 신부

옷자락을 잡아당겼지

풀어지는 사랑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에게로 가서

신부가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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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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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치고 -류시화-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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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속을 걷다 -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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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고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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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는 자의 노래 -류시화-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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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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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사이 -류시화-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게는 사이가 없다

바다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에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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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 언덕 -류시화-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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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 -류시화-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따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밝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에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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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 시 화 -

♣1957년 출생. 경희 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80~1982년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1983~19990 작품활동 중단.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이 기간동안 명상서적 번역작업을 하다. <성자가 된 청소부>

<장자, 도를 말하다> <성자가 되기를 거부한 수도승> <새들의 회의> 등 명상과 인간의식 진화에 대한 주요서적 40여권 번역.

♣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를 체험1989년 두 차례에 걸친 인도여행. 라즈니쉬 명상센터 생활

♣1988~1991년 가타 명상센터 생활

♣1991년 명상 구도 에세이집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푸른숲 刊)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와 <티벳 사자의 서>등의 여러 명상 서적도 높이 평가받음.

시집으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과 산문집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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