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의 시 모음

2007. 3. 3. 오전 11:31:43

글자

봄이오는 길목에서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결움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음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부활절의 기도

 

돌무덤에 갇힌 침묵이

큰 빛으로 일어나

눈부신 봄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용서가 미움을 이겼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웃음 잃은 이들에겐

기쁨으로 오시는 분

분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엔

평화로 오시는 분

 

산 위에 바다 위에 도시 위에

눈물 가득한 우리 영혼에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빛나는

단 하나의 이름, 예수여

당신은 왜 그리 더디 오십니까

 

오오, 주님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이제는 살아야겠습니다

하루하루를 수난의 마지막 저녁처럼

부활의 첫 새벽처럼 살아야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함께 죽어서

당신과 함께 살게 해 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어둠 속에 누워서

밝은 빛으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왜 자주 숨어 계십니까

좀 더 일찍 알아 뵙지 못했음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부활하신 세상에서

이제 거짓 사랑은 끝날 것입니다

삶을 지치게 하는 교만과 불신이 사라지고

겸손과 감사가 넘쳐 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기심의 무덤을 빠져 나와

어디든지 희망으로 달려가는

하늘빛 바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오직 죽음을 이긴 사랑 하나로

새롭게 듣고 새롭게 말하고 새롭게 행동하는

부활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님이 오시는 들길을 웃으며 달려가는

연초록 봄바람으로 깨어있게 해 주십시오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오늘

 

비 내리는 날

 

잊혀진 언어들이

웃으며 살아오네

 

사색의 못가에도

노래처럼 비 내리네

 

해맑은 가슴으로

창을 열면

 

무심히 흘려버린

일상의 얘기들이

 

저만치 내버렸던

이웃의 음성들이

문득 정다웁게

빗속으로 젖어오네

 

잊혀진 기억들이

살아서 걸어오네

 

젖은 나무와 함께

고개 숙이면

 

내겐 처음으로

바다가 열리네

 

비 밀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비오는 날에

 

1

 

비를 맞고 일어서는 강, 일어서는 바다, 내 안에도 갑자기 물난리가

나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소나기를 감당 못하는 기쁨이여.

 

2

 

온종일 사선(斜線)으로 나를 적시는 비. 나도 몰래 내가 키운 일상(日常)의 안일함을 채찍질하는 목소리로 나를 깨워 일으키는 눈물이여.

 

3

 

비가 너무 많이 와도 우리는 울고 비가 너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운다. 눈물로 마음을 적시지만 아름다운 사랑처럼 오늘도 세상을 적시는 꼭

필요한 비야, 생명을 적시기 위해 눈물일 수밖에 없는 비야.

 

4

 

삶이란 한바탕 쏟아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비와 같은 것. 폭풍속에서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말하다가도 지나고 나면 다시 개인 하늘 보며

새롭게 웃어 보는 -

 

5

 

먼지 뒤집어쓰고 피부병을 앓고 있는 도시의 꽃과 나무들을 씻어 주는 비야, 갈라진 논바닥에 떨어져 생수가 되는 비야, 그리고 오늘은 내 가슴을 적시며 마음놓고 참회의 시가 되는 비야, 씻고 또 씻어 내도 다시

그을음이 생기는 나의 일상엔 다시 내리는 비처럼 크고 작은 허물들이 참 많기도 하구나, 쏟아지는 비처럼.

 

6

 

하얀 비가 내리네. 죽어서도 잊혀진 무명(無名)의 순교자의 뼈처럼 희고 단단한 슬픔, 더디 부서지는 슬픔의 조각들이 하도 많은 이 땅에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7

 

우산도 받지 않고 빗속으로 황망히 뛰어들던 벗이여, 함께 쏟아 지는

빗줄기가 각각 홀로이듯이 함께 사는 우리도 각각 홀로임을 깨닫는

비오는 날 아침. 우리의 젊음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 해도 아직은 갈길이 멀구나. 얻기 위하여 버릴 것들이 너무 많구나.

 

8

 

비를 맞고 더욱 환해진 꽃밭의 꽃들을 보며 슬픔의 눈물을 흘린 뒤에

더욱 아름다워진 한 사람을 생각한다. 대지가 비를 필요로 하듯 사람에겐 꼭 눈물이 필요하다.

 

9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젖은 얼굴들이 보이네.

열기를 식혀서 더욱 담담하고 편안해진 참 오래된 사랑의 눈길로 그들이 나를 바라보네. 마른 가슴 가득히 고여 오는 물살을 감당 못해 나는 처음으로 비와 함께 시인이 되네.

 

10

 

젖지 않으려고 비옷을 입어도 소용 없듯이 장마철이 아니어도 계속되는 그대의 소나기 같은 사랑의 말에 나는 내내 젖지 않을 수가 없네.

 

11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소나기의 4부합창. 오랜세월 연꽃처럼 피워

올린 나의 조용한 기도에 대한 힘찬 응답의 소리로 오늘은 비의 노래를 듣는다.

 

12

 

기다릴 땐 안 오다가 문득 예고 없이 나의 창을 두드리는 비처럼 나의

죽음도 언젠가 그렇게 올테지. 미리 문을 열어 두자.

 

빈 꽃병의 말 2   

 

꽃들을 다 보낸 뒤

그늘진 한 모퉁이 에서

말을 잃었다

 

꽃과 더불어 화려했던

어제의 기억을 가라앉히며

기도의 진주 한 알

입에 물고 섰다

하얀 맨발로 섰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고독으로 불을 켜는

나의 의지

 

누구에게도 문 닫는 일 없이

기다림에 눈 뜨고 산다  

 

희망의 잎새 하나

끝내 피워 물고 싶다

 

빗속에서

 

벗이여, 오늘도 그대와 나를 부르듯

세찬 빗줄기가 크신 분의 목소리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대의 두 손으로 내게 우산을 펴주세요.

우주를 펴듯이, 소망을 펴듯이,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을 펴듯이,

아직 다 펼쳐내지 못한 나의 주름진 세월을,

접혀진 아픔들을 하나씩 펴주세요.

나날이 커지는 우산 같은님 안에서

우산 같은 사랑을 펴주세요.

 

빨래

 

초록색 물통 가득

춤추며 일어나는 비누거품 속에

살아있는 나의 때가

울며 사라진다

 

나는 참 몰랐었다

털어도 털어도 먼지 낀 내 마음 속

너무 오래 빨지 않아

곰팡이가 피었음을

 

살아있는 동안은

묵은 죄를 씻어내듯

빨래를 한다

어둠을 흔들어 헹구어 낸다

 

물통 속에 출렁이는

하늘자락 끌어올려

빳빳하게 풀 먹이는

나의 손이여

 

무지개 빛 거품 속에

때묻은 날들이

웃으며 사라진다

 

 

사랑(2)

 

문닫어도 소용없네

그의 포로된후

편히 쉴날 하루도 없네

 

아무도 밟지 않은

내가슴 겨울 눈밭

동백꽃 피흘리는

아픔이었네

 

그가 처음으로 내게 왔을때

나는 이미

그의 것이었네

 

부르면 빛이 되는

절대의 그

문닫아도 들어오네

 

탱자꽃 하얗게

가시속에 뿜어낸

눈물이었네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주님,

제가 좀더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새롭히는 사순절이 되면

닦아야 할 유리창이 많은듯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제 삶의 일과표엔 언제나

당신을 첫자리에 두고서도

실제로는 당신을 첫자리에

모시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올해에도 우선 작은 일부터 사랑으로]

이렇게 적혀 있는 마음의 수첩에

당신의 승인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거나

문을 열고 닫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저의 조그만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찬미받으소서

 

식사하거나 이야기하거나

그릇을 닦거나 걸레를 빠는 것과 같은

일상의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좀더 침묵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면

많은 말로 저지른 저의 잘못이

산처럼 큰 부끄러움으로 앞을 가립니다

 

매일 잠깐씩이라도 성체 앞에 꿇어앉아

말이 있기 저의 침묵을 묵상하게 하소서

제가 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보다 강한 그 극진한 사랑법을

침묵하는 성체 앞에서

침묵으로 알아듣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익히는 사순절이 되면

잔뜩 숙제가 밀려 있는 어린이처럼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성서와 성인전을 머리맡에 두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하는 계절

 

제가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던

가까운 이웃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번도 제대로 기도를 못한 것 같은

절망적인 느낌 속에서도 주님,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주소서

제 안에 사제로 살아 계신 당신이

저와 함께 기도해 주심을 믿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제가 먼 광야로 떠나지 않고서도

매일의 삶 속에 당신과 하나 되는

즐거운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사랑은 어디서나

 

1

사랑은 어디서나 마음 안에 파문(波紋)을 일으키네.

연못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동그란 기쁨과 고통이 늘 함께 왔다

사라지네.

 

2

사랑하면 언제나 새 얼굴이 된다.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모든 것을 신뢰하는 맑고 단순한 새 얼굴이 된다.

 

3

몹시 피로할 때, 밀어내려 밀어내려 안간힘 써도 마침내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마는 잠의 무게처럼 사랑의 무게 또한 어쩔 수 없다.

이 무게를 매일 즐겁게 받아들이며 살아 갈 힘을 얻는다.

 

4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그.

이미 그의 말로 나의 말을 하고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오래된 결합에서 오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늘 그가 시키는 대로 말할 뿐인데도....

 

5

풀빛의 봄, 바다빛의 여름, 단풍빛의 가을, 눈(雪)빛의 겨울...

사랑도 사계절처럼 돌고 도는 것.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빛을 내지만 변함없이 아름답다.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인듯 새롭다.

 

6

준다고 준다고 말로는 그러면서도 실은 더 많이 받고 싶은 욕심에 때로는 눈이 멀고, 그래서 혼자서도 부끄러워지는 것이 사랑의 병인가.

그러나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어 쓸수록, 그 욕심은 조금씩 치유되는 게 아닐까.

 

7

쓰레기통 옆에 핀 보랏빛 엉겅퀴의 강인한 모습과도 같이, 진실한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당당하면서도 겸손하다.

 

8

사랑이란 말에는 태풍이 들어 있고, 화산이 들어 있다.

미풍이 들어 있고 호수가 들어 있다.

 

9

사랑음 씀바귀 맛.

누구도 처음엔 그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가는 세월 아끼며, 조심스레 씹을수록 제 맛을 안다.

 

10

내가 그에게 보내는 사랑의 말은 오월의 유채꽃밭에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흰 나비와 같다. 수많은 나비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어도 그는 내 모습 용케 알아차린다.

 

11

사랑은 이사를 가지 않는 나의 집.

이곳에 오래 머물러, 많은 이웃을 얻었네.

내가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나는 금방 초라해지고 말지.

 

12

사랑할 때 바다는 우리 대신 말해 주네.

밤낮 설레는 우리네 가슴처럼 숨찬 파도를 이끌면 달려 오네.

우리가 주고받은 숱한 이야기들처럼 아름다운 조가비들을 한꺼번에

쏟아 놓고, 저만치 물러서는 파도여, 사랑이여.

 

13

그에게서만은 같은 말을 수백 번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와 만나는 장소는 늘 같은 곳인데도 새롭기만 하다.

 

14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식물 세포처럼 사라의 말과 느낌은 섬세하고 다채롭다.

 

15

꽃에게, 나무에게, 돌에게조차 자꾸만 그의 이름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

누가 묻지 않는데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하루에도 열두 번 알리고 싶은 마음.

사랑할수록 바보가 되는 즐거움.

 

16

어디서나 그를 기억하는 내 가슴 속에는, 논바닥에 심겨진 어린 모처럼 새파란 희망의 언어들이 가지럲 싹을 틔우고 있다.

매일 물을 마시면, 나와 이웃의 밥이 될 기쁨을 준비하고 있다.

 

17

사랑이 나에게 바다가 되는 나는 그 바다에 떨어져 녹아내리는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사네.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태어남을 거듭하는 한 방울의 물 같은 사랑도 영원하다는 것을

나는 당신 안에 흐르고 또 흐르는 물이 되어 생각하네.

 

18

사랑은 파도 타기.

일어섰다 가라앉고 의심했다 확신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파도 파도 파도.

 

 

사랑의 털실

 

당신을 향한 사랑의 털실을

감다보면 하루가 갑니다

잘못 감긴 것 같아 털실을

풀다보면 또 하루가 갑니다

감거나 풀거나 변함없는 건

사랑

아무것도 뜨지 못한 채

또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사랑할 땐 별이되고...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 가슴에 내려앉아 하늘 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는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모을 넓은 집은 네게 없어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단순히 재미로 숨은 그림을 찾는 데도 노력에 필요하듯 삶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데는 더욱 꾸준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겨울에 숨어 있는 봄. 여름에 숨어 있는 가을.

슬픔속에 숨어 있는 기쁨. 농담 속에 숨어 있는 진담

그리고 또...

숨은 것을 볼 줄 알면 삶이 지루하지 않다.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말들과 기도의 말들로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 하늘에 조용히 떠다니는 한 조각의 구름이고 싶다.

 

산 위에서

 

1

산을 향한 내 마음이 너무 깊어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섣불리하지 못했다.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글로 써 내려고 하면 왜 이리 늘 답답하고

허전해지는 걸까.

 

2

나무마다에 목례를 주며 산에 오르면 나는 숨이 가빠지면서 나의 뼈와 살이 부드러워지는 소리를 듣는다. 고집과 불신으로 경직되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유순하게 녹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3

산에서는 시와 음악이 따로 필요없다. 모든 존재 자체가 시요 음악인 것을 산은 나에게 조금씩 가르쳐 준다. 날마다 나를 길들이는 기쁨을, 바람에 서걱이는 나무 잎새 소리로 전해 주는 산.

 

4

내가 절망할 때 뚜벅뚜벅 걸어와 나를 일으켜 주던 희망의 산.

산처럼 살기 위해 눈물은 깊이 아껴 두라 했다.

내가 죽으면 편히 쉴 자리 하나 마련해 놓고 오늘도 조용히 내 이름을 르는 산. 살아서도 남에게 잊혀지는 법을 처음부터 잘 익혀 두라 했다.

보고 나서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기다림의 산.

 

5

산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돌과 나무와 이끼처럼 그의 품에 안겨 기도할 뿐이다.

소나무 빛 오래된 나의 사랑도 침묵 속에 깊어진 것을 나는 비로소 산에 와서 깨닫는다. 산을 닮은 한 분을 조용히 생각할 뿐이다.

 

6

깊은 산 옹달샘에서 물을 떠 마시며 문득 생각하네, 사랑은 자연 그대로의 물맛인 것을. 물 위에 그리운 얼굴 하나 떠올리며 또 생각하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물맛인 것을.

 

7

노래하는 마음으로 풀꽃을 따면 옷에도 가슴에도 풀물이 드네.

풀독이 오른 내 하얀 오른팔 위에 찍혀 있는 눈부신 아침.

내 영혼의 속살까지 풀물이 드는 첫 기쁨이여.

 

8

시(詩)를 노래하면 새가 된다고 - 산에서 나와 눈길이 마주친 한 마리의 귀여운 새가 일러 준 말.

쓰지 않고 품기만 해도 뻑뻑한 일상의 숲을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갈 수 있다고 오늘 아침 산에서 만난 자유의 새가 일러 준 말.

 

9

산에서 비에 젖은 바위를 보면,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산에 올라 꽃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큰 비를 만나 울면서 울면서 산을 내려왔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산이 참 무서웠다. 그때 나와 함께 산에 갔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도 비오는 날의 산을 보면 문득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하며 궁금해할지도 몰라.

 

10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될 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 이야기는 나만이 아는 것.

세상에 사는 동안 다는 말 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품고 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 낼 수는 없다. 꼭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준다. 좀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11

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시커먼 연기에 그을린 도시의 얼굴을 씻겨

주고 싶다. 나도 모르는 새 정이 든 이 항구 도시에서 같은 배를 타고

사는 이웃의 목마름을 축여 주고 싶다. 산에서는 바다가 더욱 가까이

있다. 잊었다가 다시 만난 옛 친구의 낯익은 얼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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