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발표문-이요안나님

2006. 9. 6. 오후 8:56:45

글자

<<참제자 피정시 체험 발표하였던 글이므로 절대로 다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월계동에서 온 이정화 요안나 입니다.

 

친구가 전화로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순명 해야 한다고 협박을 하면서, 이번 피정에서 가난에 대하여 발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선배들 앞에서, 말 주변도 없는 저는 바쁘게 살아가느라고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난 날을, 다시금 정말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빠가 둘 있었지만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결혼 할 때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인자하신 부모님 밑에서 사랑 받으며 살다가, 늦은 나이게 하느님이 누구신지 신부님이 계시다는 것도 성당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고, 수녀님의 모습이 좋아서 성당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리 실에 들어오신 신부님(현 오 영진 주교님)께서 상의를 벗어 놓았는데 안지가 다 떨어진 아주 낡은 옷 이었습니다. 신부님의 가난한 삶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 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에게 홀딱 반해서 교리도 열심히 배웠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새벽 미사도 다니며, 교리 중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속성으로 3개월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바로 빈첸시오회에 입회를 했는데, 그때 회장이 지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도미딜라, 카나리나 언니도 알게 되었고, 어쩌면 그들이 신부님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고 더 빈첸시오를 택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저에게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는데
첫째는 잘 놀래고, 눈을 감으면 귀신이 보여서 밤에는 불을 켜놓아야 잠을 잘 수 있고 가위에 눌려 비몽사몽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둘째는 걸음을 빨리 걸어도 계단을 두 개만 올라가도 숨이 차서 힘든 상태였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무서움이 억습해 와서 하느님이 어떻게든 해주시겠지 하는 믿음이 생기자, 그때부터 숨찬 것과 무서움이 깨끗이 없어졌고, 날아 다니 듯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무지한 저에게 인자하신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빈첸시오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머리를 깎아 주고, 도배도 해주고, 걱정도 함께 하면서, 사랑의 나눔도 배웠고, 함께하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내 생애 가장 자유롭고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봅니다.

 

그러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결혼 전에 같은 직장에 다녔는데 그 때에 형제들과 자취를 했는데, 주인집 아줌마가 남편의 형을 중매를 했는데 그 당시에는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결혼할 마음이 없어 매일 오는 전화를 매정하게 끊었는데, 직장을 그만 둔 후 5년 만에 우연히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시부모님이 저를 무척 마음에 두셨는데, 형이 안되니까 자기라도 데려오겠다고 하며 끈질기게 구애를 해서, 친정 부모님께서는 너무 철없는 가난한 남편이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그래도 과년한 딸의 결혼이라 반대도 못하시고, 성당에서 홀딱 반했던 오주교님의 주례로 혼배를 하였습니다. 그때 남편은 외인 이였습니다. 별 직장이 없었던 남편은 시숙이 하는 공장에서 일하기로 하고 방은 동서가 얻어 놓았다고 해서 우리는 신혼여행 후에 장롱을 사가지고 갔는데, 산등성이 언덕 위에 조그만 방 한 칸에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부엌과 마당에 수도가 있는 집이었는데, 8자 방에 장롱이 안 들어가서, 지그재그로 넣으니, 둘이 자면 꼭 맞는 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바로 아이가 생겨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때는 세탁기나 짤순이도 없었고, 한겨울에 기저기를 빨면 아이는 밤에 잠을 못 자고 기저귀를 많이 내놓았는데, 마르지 않아서 방에 줄을 치고 말렸는데, 아이는 온통 하얀 기저기를 보면서 컷 습니다. 빨래는 고드름이 얼어, 몇 날을 말려야 했고, 마당에 수도는 얼 까봐 조금 틀어 놓으면 물이 다 빠져 나가지 못하니까 마당 전체가 얼어서 망치로 다 깨야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세 식구 살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었고 남편은 내가 밖에 나가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친정부모님이 나를 결혼시키고 무척 섭섭해하셨는데, 친정에도 하루 밤도 자고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도 병적으로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업을 하며 주일날 성당만 간신히 다녀오곤 했습니다.
또한 남편은 시숙과 같이 일하면서 돈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뜻이 맞이 않아 불평이었고, 40 만원에 5 만원 이였던 집세도 내기 힘들었고, 아이가 돌이 지나자, 방도 좁고 옛 직장, 사장님 보증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다시 그리웠던 구로동으로 이사를 와서, 대출금액은 그 직장에서 일거리를 조금씩 가져다 주고 해서 갚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직장을 잘 다니지 못했습니다. 들어가서 2-3 개월 있으면 여러 가지 이유로 나오고, 또 놀고, 짜증나면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고, 친구들 데리고 와서 술 먹고, 단칸방에서 재워 보내고, 나보고는 나가서 자고 오라고 하고, 아이들 보는 데서 컵을 입으로 까고, 그러는 남편을 더 알려고도 않고 포기하며, 그냥 희망 없이 살아가던 중에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는데, 몸이 몹시 부어서 누우면 숨차서 눕지 못하고, 15일 동안 답답해서 밖에 땅 바닥에 앉아서 지새우다 병원에 갔더니, 류머티즘 열심장 판막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해지는 절망감을 안고, 입원을 해서 9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나도 아이도 반반이었습니다.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한달 동안 들어가 살아야 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은 저는 밤에 잠도 못 자고 보채는 아이를 때리기도 하고, 아이는 건강하지 못하고 자폐증같이 과자를 줘도 입으로 받아먹고 두 돌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이 였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그런 아이를 버리라고 까지 했지만,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낳은 아이를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던 중에 어느 날 구 신부님께서 저희 집을 방문 오셨습니다. 그때 너무 의지할 때 없던 저는 큰 힘을 얻었고 신부님은 큰 애에게 500원을 주머니에서 내어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때 저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구 신부님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친구가 쌀을 좀 주겠다고 빈첸시오에서 했는데,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빈첸시오 대상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받은 것을 배우지 못한 저는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감추어야만 했습니다.
몸도 아프고, 가난했고, 가장 사랑 해야 할 남편과의 힘든 고통은, 나로 하여금 절망하게 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과자를 못 사주니까 가게에 가서 물건을 가져 오기도 하고 두부를 칼로 그어서 물어주기도 했지만 그때의 제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의지 할 곳은 오직 주님뿐 이었습니다. 고통이 밀려오면 소 성당으로 가서 성체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며 "정말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해주셔요, 당신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고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정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이사야서 52장을 읽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서 새로운 날의 희망과 자유를 약속하신 구원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벼랑 끝에 서있는 저를 희망의 말씀으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 분께서 주시는 희망으로 움 추린 가슴을 활짝 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풍선 확장술을 권하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 친구가 돈을 준비 해줘서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큰 돈이지만, 그때는 너무 큰 돈이었는데, 저는 친구가 모금해서 준 것으로만 알고 그렇게 큰 은혜를 입고도 힘들게 사느라 인사도 못 드렸는데 며칠 전에 친구를 통해 그분이 참 제자 모임에 오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밝혀도 될까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내가 힘들 때 마다 제 곁에 있어준 친구가 있습니다. 남에게 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말도 그 친구는 들어주었고 위로해 주고 도와 주려고 애썼습니다. 정신부님께도 그 친구가 연결시켜 주었고, 신부님께서도 제 이야기를 항상 어느 때라도 들어주셨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와 남편은 번갈아 가며 정신부님을 귀찮게 힘들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을 통해서 기다려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또 뵙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사시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존경심이 생겼고, 선물 주며 신자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며 살자는 신부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죽더라도 남편이 세례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남편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살길이라고, 내가 포기하면 사탄한테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쉼터에라도 가 있으라고 권했지만 아이들도 그렇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남편을 더 소외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아이들은 커가고, 저는 아이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은 신앙뿐이라고 생각했고 평일 미사에도 두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다니고, 남자애들이라 산만하니까, 수녀님이 그러려면 나오지 말라고 하시는 서운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데리고 다녔습니다. 저에게는 아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착하게 컸고 비록 먹을 것. 옷 등도 사주지 못하고, 얻어먹고 얻어 입히고 했지만, 아이들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발이 떨어져도 양말이 떨어져도 꿰매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커서도 아낄 줄 알고 형편에 맞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 흔한 핸드폰도 대학에 들어가셔야 어쩔 수 없이 사주게 되었는데, 그때 그 아이가 너무 좋아서 "어머니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하던 인사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이들은 과자 한 봉지만 사줘도 "감사합니다" 하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입는 것 먹는 것 얻어 먹으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한집이 부엌도 창문도 없는 집이 였는데 연탄가스 냄새도 많이 나고 쥐들 때문에 마당에 있는 화장실도 애들이 무서워 못 가고 밤에는 물방개만한 바퀴벌레가 마당에서 방으로 기어들어와 몸을 파고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는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았는데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쉬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다 연탄가스 냄새와 겨울에는 아이들이 추어서 씻지도 못하고 방도 너무 차가워, 아이들과 나는 서로 발을 비비며 잠들 곤 했습니다. 저는 밥을 불에 올리고, 그 자리에서 앉을 수 있고 잠깐이라도 누울 수 있는 입식 부엌이 이었으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은 병든 저를 더욱 힘들게 하였는데 더욱 힘든 것은 남편과의 고통 이였습니다. 하는 일이 잘 안되자 전화하는 것도, 오는 것도, 골목 쓰는 것도 비올 때 빨래 걷어주는 것까지 싸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까지도 저는 남편이 왜 그런 성격이 되었는지 이해를 못하고, 원인이 무엇인지는 생각지도 않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오로지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 눈앞의 고통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하느님께 기도해서 "아빠 죽여 달라"고 하라고 그 어린 입으로 말했을 때 저는 또 다시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어 아이들에게는 어떻게든 아빠를 이해 시켜주려고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남편은 직장도 오래 다니지 못했고 집에 전화 온다는 핑계로 직장을 그만두고 몇 개월씩 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자매님이 레지오 입단을 권유했습니다. 저는 그때 까지도 빈첸시오에 미련을 두고 있었고 쉽게 결정을 못했는데 빈첸시오회합은 밤에 하는 관계로 결국 레지오를 선택했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빈첸시안 이었습니다.
보살펴 줄 이 없는 할아버지의 대소변이 묻은 이불을 빨면서도 그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보잘것없는 이 몸을 쓰심에 감사했고, 어느 불쌍한 형제의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기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했기에, 병이 있었기에, 고통이 있었기에,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 아픔을 공유할 수 있었고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활동을 하며 참는 것만이 선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악을 물리치려면 강해야 하고 함께 살려면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시누이의 말을 듣고 남편이 왜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8남매에 7형재중 넷째 아들이고 시아버님은 목수이셨는데, 지방으로 몇 달씩 다녀오곤 하셨고, 시 어머님은 농사도 없고 낮이나 밤이나 놀러 나가시고, 시누이는 그것이 싫고 그래서 엄마도 싫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형이나 동생들 때문에 사랑을 못 받았고 시어머님께서는 부부싸움 화풀이도, 만만한 남편에게 했답니다. 어릴 때부터 억울함을 많이 당한 남편은 하고 싶은 공부도 형들이 방해를 해서 못했다고 맺힌 것이 너무 많아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은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성격이 비뚤어졌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의 외로움을 알게 되었고, 무조건 남편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을 반성해서,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애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아빠만 잘못했다고 하지 말고 엄마도 잘못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느냐고. 그 말이 주님의 음성으로 귓전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전 그날 나를 돌아보며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남편도 많이 힘들었을 꺼라고, 잘 해야겠다고, 반성했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을 남편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를 남편도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애로운 하느님은 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결혼 13년 만에 세례를 받고 그 해에 견진도 받고 레지오 활동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뿐 레지오에서 갈등을 겪으며 냉담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너무 성급히 변화되는 것을 바랬던 저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기다림이 돼 저도 조금씩 변화되기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자매님이 집을 방문했습니다. 피정 중에 신부님이 밖에 나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오라고 해서 저를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의 사는 집이 천 만 원짜리 전세인데 이 백 만원이 부족해서 한 달에 4만원씩 월세를 주고 있었고, 저는 병원에도 못 가고 있다는 형편을 듣고 200만원을 줄 테니 4만원 월세 내는 돈으로 병원을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 돈은 제게 너무나 큰돈이었고 나 혼자 감당하기엔 두려워서, 신부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혹시라도 그 돈 때문에 요안나가 구속 받을까 봐 걱정은 되지만 그 자매님이 진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도 감사한 마음으로 그 돈을 받아 방세를 주었습니다. 사 만원이란 돈은 저희에게 부담이 되었기에 그 분에게는 너무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왜 이렇게 관대하신지 죄 많은 저를 이토록 사랑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힘과 용기로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면서 지내던 중에 저를 봐주시던 의사 선생님이 제가 오랫동안 병원에 안 가니까 한번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심장 초음파 검사를 무료로 해주셨습니다. 그 분은 항상 저에게 친절 하셨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께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IMF가 올 즘에 남편은 가게를 사서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고 말렸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겠다고 하며 빚을 내서 기계를 사고 가게를 얻어 개업식을 했습니다. 신부님께 축성을 부탁 드리고 자매님들도 돈 많이 벌게 기도하라고 하기에, 저는 돈보다도 먼저 제 남편이 하느님을 알게 해달라고 주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남편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돈에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한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IMF가 터지면서 일거리가 없어지고 기계 값도 갚지 못한 채 허덕이었습니다. 남편은 일이 마음대로 안되면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집안으로 가져와 가족에게 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집에 소방도로가 나는 바람에 저희는 이사를 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임대아파틀 준다고 하여, 정말 고향 같은 떠나기 싫은 구로동을 등지고 정반대 방향인 월계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크나 큰 선물이었습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 17평이었고 방이 2개 있었습니다. 작지만 아이들의 방이 생긴 것입니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가 새집으로 이사오니 방도 넓은 데다가 깨끗했고 집 바로 뒤에 작은 산도 있어 별장에 온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이 집이 정말 우리 집이냐고 꿈이 아니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고, 저는 푸른 산을 보면서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셨을까 생각하며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했던 대로 부엌에서도 누울 수 있었고 화장실도 편했고 남들은 조금 더 넓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우리가족은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이사온 후에 남편은 직장이 없어 놀게 되었고 조금 저축해 있던 돈마저도 알뜰하게 찾아 쓰고 남편은 한동안 실업자로 있다가 형이하는 공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형이하는 일을 동생과 나누려는 형의 배려였습니다.

저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걷는 것까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심정은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그냥 살다가 죽을 때 되면 죽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친구가 수술을 받자고 했고 아이들을 생각하라는 친구의 설득에 못 이겨 수술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 동사무소에서 어려운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1종 의료를 해주는 것이 있어서 동사무소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수술 받을 때 만이라도 쓰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어 주었고, 심장 재단에 도움을 청해놓고 있는 상태에서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 119에 실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장 재단에 연락해보니 지원해 준다고 해서, 모두의 도움으로 저는 긴 시간의 수술을 하게 되었고 조금만 늦었어도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좋은 병원 최고의 의료진을 만나 수술 받고 저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술하는 날 새벽 5시에 달려와준 친구와 요셉 형제는 너무 두렵고 외로웠던 저에게 하느님이 보내준 천사들 이였습니다. 그때의 고마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친구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로 태어난 저는 침체되어 있는 저희 구역에 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노인층으로 이루어진 반원들과 젊은 층은 직장 때문에 바빳고 결국은 건강 때문에 집에 있는 제가 구역 일을 하게 된 것은 이 먼 곳까지 보내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친구의 장례식에 갔다 오더니 이상하게 몸에 이상이 생겨 잠도 잘 못 자고 종합검진을 받아도 병명이 나오지 않고 한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생긴 남편은 신부님에게 안수도 받고 안되니까, 정신부님께 전화해서 상의 드리니까 동성학교에 철야기도에 가서 기도를 받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남편도 정신부님이 좋아서 세례명도 같은 걸로 받았습니다. 남편은 매주 금요일 마다 그곳에 가서 기도를 받고 오더니, 몸도 나아졌고 그 때부터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부지역장도 맡아 열심히 활동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고통은 하느님이 부르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남편을 무척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의 허락을 얻어 구역장을 맡게 되었고 반장도 없이 구역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구역 일을 하면서 저는 건강과 기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남편은 성당을 열심히 다니면서 자유와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고, 그렇게 변화되어 가는 남편을 보고 주님께 감사 드리며 나 또한 남편의 덕으로 변화되어 이제는 어떠한 일이 생겨도 주님께 한번 여쭤보고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정신부님이 그러시는데 요안나가 프라치스코 때문에 성인이 될 꺼라고요,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서 내 방법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짧은 인생 동안 우리는 많이 싸우고 삽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더욱 남편이다, 아내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다 서로 다른 사람이죠,
분명이 콩인데 팥이라고 우길 때가 있습니다. 꼭 이기도 싶을 때가 있나 봅니다. 그때는 그저 팥이구나 하고 말해줍시다. 그것도 사랑의 일종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 때문에 죽을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 불멸입니다. 우리의 모든 법은 우리 편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가 좋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합니다.
정말 고통 중에 하느님은 더 간절히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모두 얼마나 바쁘고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저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신 하느님. 그렇게 좋은 하느님을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불행한 모든 이 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이 우리 집의 보물입니다. 큰 아이는 애 어른이 되어서 마음 아플 때 많지만 그래도 착하고 믿음직하죠, 그 아이는 하느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저는 드릴께 건강한 몸 뿐 이라고 헌혈을 자주합니다.
작은애도 지금은 건강히 잘 자라서 착한 아들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프라도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은 제 생애 크나큰 은총입니다. 그분들의 가난함을 통해서 가난을 배웠습니다. 나의 소중한 친구 카타니라 언니 너그러움에 먹을 김장김치를 담아주신 미카엘라 언니. 그리고 모든 은인께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비우고 또 비워서 주님 앞에 부끄럼 없기를 기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사랑 가득한 목소리로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너 있다'라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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