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탁필봉 -청량산인(퇴계) 이황이 즐겨 찾던 곳>
요즈음은 우리 한국인, 한국사회의 창조성, 창의성의 원동력
다시 말하면, 한국인 삶의 원형질적 체험이
과연 어떤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일제 때 어떤 일본인(柳宗悅, 야나기 무네요시)이 이야기했다는 ''자각된 한(恨)''을 품고 사는 삶에 바탕한
지사(志士)로서의 삶이 지닌 창조성, 창의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자주 깊은 상념(傷念)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과거사 청산이 강조되는 시기에는, 이 역시 가치있는 삶이기는 하지만,
어쩌다가 "진보"를 표방한 세상이 이렇게 싸움판이 되었을까요?
우리나라는 역사 저멀리 15-16세기 왜란과 호란 이후,
"부득이한 시절을 만나, 아픔을 참고 한(원한)을 품어낸다(忍痛含怨 迫不得已)"는
여덟 글자의 12세기 말 주자(朱熹, 南宋人) 말을 따라, 큰 뜻을 품고 사는 지사로서의 삶,
다시 말하면 중국인 국가가 북방족의 고난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지켜냈던 시절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다는 표방이,
그대로 몇 백년 동안, 조선의 시대정신을 이끌어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체험들이 20세기 전후에,
한말 서양-일본 제국주의적 침략군에 대항한 동학농민-의병-독립운동가-세계전쟁적 체험들로 인해 되살아나면서
아직 그대로 이어져오는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과연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창의적 체험을 담보하는 원형질적 삶의 모습이
이러한 지사적 삶의 모습들에서만 연유하는 것일까요?
다시금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조선식 성리학을 처음 정착시키고, 그 삶의 모습대로 제자를 키워낸 퇴계 이황은
스스로에게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호를 붙이고, 그렇게 자연과 함께하며 살았지요.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느니 나와 백구
백구야 말 옮기랴, 못 믿을건 복사꽃 배꽃이로다
복사꽃 배꽃아 떨어지지 마라, 나무꾼이나 어부(漁舟子)가 알까 하노라"
이 시조는 혼란하기 짝이 없는 분열된 중국 남북조시대를 살면서,
세속을 떠난 맑고 담백함(淸淡)을 지키고 싶어했던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이미지를 빌렸지만,
그 바탕은, 중국보다 규모가 작은 우리네 삶에 적용할수 있는 조선식 주자성리학을 깊게 깨달은 후에,
속세(俗世)를 떠난 맑고 담백함의 이미지를, 세간(世間)에 머무는 맑고 시원함(淸凉)의 이미지로 변화시켜,
한나절 즐겨 홀로 거닐 수 있는 규모 작은 조선국의 청량산에 붙여서 읊었던 겁니다.
당시 많은 인물들의 솔직한 평을 남겼던 율곡 이이는 퇴계를 만나보고 나서,
''비갠 후 구름을 뚫고 나타나 비추는 밝고 맑은 달(霽月)'' 같은 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퇴계의 학통이 계속 이어질수록, 퇴계의 삶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왜란과 호란 이후 시대 조선인들은, 예컨대 18세기말 채제공(蔡濟恭) 같은 분들의 시를 보면,
당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세계제국이었던 중국 청나라의 크고 화려한 삶의 규모에 비교하여,
조선의 삶의 규모를 청량하고 맑은 삶의 규모라고 대비하면서,
"청류(淸流)=맑고 청량한 흐름"을 특히 좋아하기도 했지요.
아마도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한(恨)을 품어냄=함원(含怨)''과 비교하면,
그나마의 삶조차도 헐벗어 버린 바보 같은 삶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인지 황동규 시인은 그의 시 ''달밤''에서
''두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이라 읊기도 했습니다.
"한을 품어내서, 큰 뜻을 곧게 실현해 나가는 삶"도 한국인들이 오래 보존해 온 좋은 삶이지만,
"청량함을 품어내서, 헐벗고 가난함을 여유롭게 보는 삶"도 그만큼 오래 보존해 온 좋은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恨)''을 품어내어 사는 삶이 되살아 남도 좋지만...
''맑음(淸流)''을 품어내어 사는 삶 또한 되살아 나기를...
연주곡 : 달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