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영화에도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습니다. 그 기준을 따지기 시작하면 꽤나 복잡해지겠지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감정에 깊고 큰 반향을 주는 작품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이겠지요. 그런 울림을 주는 영화 가운데서도, 보고 나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영화와 목에 뭔가 걸려 있는듯이 불편한 느낌을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따스한 영화든 불편한 영화든, 우리의 무딘 정신을 각성시키는 영화라면 볼 만한 것일테지요. 예컨데, 앞의 것은 아빠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일 것 같고, 뒤의 것은 파스빈더나 데이빗 린치의 영화일 것 같네요.
일단 <이웃집 야마다 가족>은 보고 나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따스함은 그 자체로는 아무 미덕도 아닙니다. 따스한 것 처럼 보이지만, 대개는 닭살 센티멘털리즘으로 빠져 버리는 영화가 널려 있지요. 더해야 하는 건, 당연하게도 삶에 대한 통찰 입니다. 감독이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에서 읽어 내는 삶에 대한 통찰은 아주 설득력 있고 어느 땐 매혹적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긴장과 무기력, 세상에 토해내는 만성적인 짜증, 그럼에도 봄바람 처럼 잦아드는 작은 기쁨과 환희, 이 모든 게 적절하게 버무려져 살아 간다는 게 이렇게 생동한다는 걸 넌지시 전해 줍니다. 성찰이 없으면 삶에 진실이 있다고 쉽게 말 할 수 없습니다. 테레비 켜놓고, 신문 읽으며, 딴 생각하는 꼴 일겁니다. 그러면 삶은 내가 살아 가기는 하지만 실상은 내가 사는 게 아닐테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진부한 일상에서 무엇을 주의 깊게 살펴 봐야하는지요.
이 영화에는 여러 에피소드를 몇 가지의 주제로 묶은 다음 그걸 요약해 주는 듯한 하이꾸를 주제에 따라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장치인 거 같아요. 이 때문에 영화는 단지 유쾌한 것 뿐 아니라 매우 성찰적이 됩니다. 바쇼, 부손, 이사와 같은 일본의 하이꾸 작가들의 시가 나오지요. 하이꾸는 17음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입니다. 특히 바쇼의 하이꾸가 많이 인용된 걸로 기억하는데, 바쇼는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는 17세기의 하이꾸 작가 입니다. 바쇼의 하이꾸가 나오는 영화 한 장면이 이렇습니다.
다음처럼 읽는다고 하네요:
무즈안 야 나
카부토 노 쉬타 노
키리기리수.
얼마나 안타까운지
[위대한 전사의] 빈 투구 아래
귀뚜라미 소리.
이게 뭔 소린가 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12세기 초 일본에 사네모리라는 장수가 전쟁에 나갔습니다. 워낙 열세인 탓에 모두들 도망가고 자기 혼자만 남게 됩니다. 결국 적에게 잡혀서 죽게 되고, 고향에는 목이 잘린 시신과 함께 그가 썼던 투구가 돌아 옵니다. 사네모리는 60이 넘었지만 머리와 수염은 여전히 검은 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할 일 많은 사람이었다는 거겠지요. 바쇼는 이 장수가 묻힌 묘지에 가서 이 헌사를 바쳤다고 합니다. 평범하고 소심한 야마다 씨의 외로움과 상실감은 용맹스러웠지만 실패했던 장수의 투구 속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은 걸까요? 그네에 앉아 있는 야마다씨는 어떤 투구를 쓰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자잘한 어려움과 쓸 데 없어 보이는 삶의 진부함을 통과한 야마다 가족이 마지막 장면에서 합창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Que Sera Sera! 야마다 가족의 합창이 허튼 낙관으로 들리지 않는 건, 우리의 인생은 사소한 것이 겹겹이 쌓여져 만들어진 어떤 깊이라는 걸 감독이 잘 설득했기 때문일 겁니다. 절로 미소를 짓게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여러 무드로 여러 사람들이 불렀겠지만, Hermes House Band라는 영국 그룹이 편곡한 복고풍의 경쾌한 곡이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 그룹은 지난 월드컵 때, 영국을 응원하는 노래를 불러서 떴다고 합니다. 케 세라 세라도 응원가 가운데 하나였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