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의 역사

2006. 11. 13. 오전 6:00:52

글자

 [어제 영화의 배경이 된 북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셔서 여기에 올립니다. 영화도 보고, 역사공부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등등 일석몇조인가요?  어제 마음이 많이 아팠죠?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를  함께 기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평화그리고생명]북아일랜드 약사

 

[속보, 사설/칼럼] 2003년 09월 03일 (수) 21:30

 북아일랜드 분쟁을 야기시킨 기폭제는 정치 경제적 차별이었다.

다수자인신교도들이 정치권력은 물론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소수자인 아일랜드계구교도들을 취업과 공직 임용 및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강요한 것이 분쟁의직접적인 계기였다.


2차세계대전 이후 아일랜드의 중남부 지방은 처절한 투쟁 끝에 1949년영국연방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러나 아일랜드 동북부, 얼스터 지방 6개주는 주민투표 끝에 영국에 잔류하기로 했다.


주민의 다수가 영국에서 이주해온 영국계였다.


2차대전 이전부터 영국은 얼스터 지방에 조선소 등 중화학 공업을 유치했다.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도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제작됐다.


2차대전후아일랜드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대거 북아일랜드로 넘어왔고, 위협을 느낀 영국계신교도들은 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항의하는 구교게의 불복종운동은1968년부터 본격화됐다.


영국은 초기에 싹을 도려낼 심산으로 강력 진압에 나섰고 이것은 훗날 가장 큰골칫거리로 대두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활동을 부추겼다.


신교도쪽은 얼스터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했다.


양쪽의 충돌이 격화되자 영국 정부는북아일랜의 자치권을 회수했지만 충돌은 더욱 격화됐다.


1972년 1월 30일데리(신교도는 런던데리라고 부른다)에서 영국군은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13명의소년들이 피살됐다.


그후 최근까지 추정치로 약 4000여명의 사망자와 4만여명의부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북아일랜드 인구는 160만명이다.


서방 백인사회의 적극적인 의지가 작용해 1994년 평화협정이 조인됐고, 1997년 IRA가 휴전을 선언했다.


그후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북아일랜드 신구교도를대표하는 정당들이 참석한 다자회담이 계속됐고, 1998년 4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즉 󰡑굿 프라이데이 어그리먼트󰡑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협정은, 현실 속에차별이 존재하고 이 차별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려는 세력이존재하는 한 제대로 이행될 수 없었다.


무장투쟁을 고집하는 󰡑리얼 IRA󰡑는 8월오마그 폭탄테러를 일으켜 29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2000년 8월에는 런던데리의영국군 캠프에서 폭탄테러로 군무원 1명을 살해됐으며 9월엔 영국 런던의해외정보부 청사가 로케트탄에 피격됐다.


신교도 과격단체 역시 2002년 구교도계우편배달부를 이유없이 살해하고, 저격 대상 명단을 발표해 불안을 고조시켰다.


또자신들의 구역에 있는 구교도 초등학교에 아이들이 등교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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