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

2006. 11. 24. 오전 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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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성월

 

작년 가을 단풍은 유난히 아름답고 선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가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아름다움을 찾아 아내와 함께 Devil's Lake State Park을 찾았습니다.

가을은 유난히 짧지 않습니까? 그 아쉬움에 하이킹을 하면서 한 뼘의 가을이라도 더 만져보려고 안간힘을 써 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가을과 같다고 할까요! 가을처럼 풍요롭고 온갖 색색의 단풍이 들어 그 아름답고 화려함을 만끽하려 하자 마자 그냥 낙엽이 지고 이제 모든 걸 마감해야 하는 듯함이 밀려드는 그런 인생말입니다...

어느 오후, 잠시 한가함을 틈타 낙엽 굴러가는 창밖 뒷뜰을 내다 보니 길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 사이로 마냥 외로움이 베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난이들의 모습이 일렁이는 그림자 사이로 들어왔다가 사라져가고 그리고 나의 그림자가 그 뒤를 쫓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공포를 느낀적은 없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을 통하여 적어도 한번쯤 혹은 여러번 죽음이란 장래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5-6 학년쯤에 죽음이란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교회(카톨릭 교회가 아님)에서 부활과 내세(사후세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아마 그 이해의 부족(?)으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고통스러울까? 어디로 가는걸까? 춥고 어둡고 험한 가시밭길 같은 곳을 지나야만 하는 걸까? 죽으면.... 죽으면....? 죽으면.... ?  .....? .....?

의문과 두려움과 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디 깊은 우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기분과 함께 머리가 죄여드는 고통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하느님에 대한 확신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진 뒤로부터 나는 그 두려움, 공포, 그리고 혼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부터는 아무리 절박한, 어떤 두려운 상황을 맞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느끼지 않은 듯 합니다. 대학을 마치고 군 복무중 군종이란 직책때문이기도 했지만 최전방에서 안전사고로 숨진 전우의 시체를 혼자서 밤새 꼬박 지키던 일이며 제대후 가진 첫 직장인 강원도 광산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한 광부의 시신을 산골짜기 깊은 계곡 입구에 임시로 설치한 천막 안에서 혼자 밤새 지킬 수 있었던 것도(아내는 가끔 작은 체구에 간 큰 남자라고 말하곤 하지만)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의 마침일 뿐이며 또 다른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 께서는 2005년 4월 265대 교황 즉위 미사에서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에 대하여 "그 분은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 가시면서 다음생의 문턱을 넘으셨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죽음으로써 우리의 삶을 완전히 마감한다는 생각을 마십시요.

 한 지구 종말에 대한 재미있는 나의 어린 시절이 기억납니다. 과거에는 과학이 덜 발달되어서인지 지구 종말에 대한 예언 소동이 종종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모년 모월 모시 지구에 근접하던 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믿을만한(?) 천문학자의 예언이 있어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상당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집 골목 건너편 만자(지금은 60세가 훨씬 넘었을 구멍가게집 딸)네 구멍가게에 앞 뒷집 이웃들이 모여 가게 물건을 몽당 먹어 버렀습니다. 내일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라며... 그러나 지구는 여전히 지금까지 돌고 있으며 그 예언자는 자살했다는 소문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져 갔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필립비 1:21, 23)

사도 바울로는 주님게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감히 죽음 따위는 그의 염려 대상 조차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는 것이 그에게는 득이 된다고 했습니다.

수 많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온갖 박해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만해도, 아니 형리들의 물음에 아무 대꾸만 하지 않았어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건만....

 죽음이라는 염려와 고통에서 해방되면서 나는 교우 여러분에게 세상을 떠난 이들과의 교분을 권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하여 혹은 다른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할 수 있음은 정말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속죄하고, 희생을 바침으로써 그들의 죄와 벌을 용서 받을 수 있고 또한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빌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11월 1일에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그 다음날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길 권합니다. 이 기도중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 생활 중에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가을을 보내며 Beaver Dam에서

                                                                                                          권 스테파노

                                                                                                                                     (11 / 05)

 

 

 

 

 

 

댓글 1

  • 2006년 12월 1일 오전 8:35

    좋은 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