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군 225일의 희망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

2013. 11. 19. 오후 6: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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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또 다른 시작을 여는 희망의 사도

 

                                       11월 17일 강론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첫사랑보단 짝사랑에 대한 기억이 더 많은 저는 짝사랑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음을 나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짝사랑에 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눈물 나도록 전문가입니다. 짝사랑의 장점 세 가지라면 첫째 상대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 둘째 데이트 비용이 절대 들지 않는다, 셋째 내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한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점은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상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짝사랑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짝사랑에 대한 강한 열병을 앓을 때가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내 생애에 사람이 보고 싶어 몇날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운 적이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눈물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진정으로 흘린 눈물처럼 자신에게 눈물을 흘려도 상대에게서 눈물을 빼앗지 말라고 세상에 그거만큼 비열한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눈물, 우리의 고민, 우리의 고독, 우리의 아픔이 우리 자신을 썩게 하여 소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봄에 심어진 생명이 희미하게 움직여 여름엔 태양이 작열하는 열기의 시련을 이겨내고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 마침내 겨울에는 모두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희망 역시 그렇게 결실을 거두리라고 확인한 시간이 감히 이야기하자면 바로 대한문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시련이라고 여기는 희망의 씨앗을 대한문에 심어 희망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곳 대한문의 떠남이 마치 큰 패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싸움이 아닌 정의가 그리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 대한문에 모인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싸움이 정말 힘든 건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싸울 의지가 없는 이들에게 싸움을 거는 겁니다. 사실 싸울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싸움을 걸어오는 이들을 압도한 초연함입니다. 이러한 초연함을 그 어느 누구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이곳 대한문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미사에 참여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초연함을 배우고 익혀 결실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 초연함이 지니고 있는 힘은 어느 특정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발휘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각자 우리 모두는 지난 8개월 동안 이곳 대한문에서 미사를 봉헌한 시간들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헛됨이 아니라 부단하게 초연함과 희망을 맺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일 마지막이라는 말보단 또 다른 시작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처럼”(요한 3,15) 바로 그 시작이 우리가 희망을 믿는 사람처럼 영원한 희망을 얻기 위한 힘찬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하나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천만 다행스러운 건 한결 여유가 생겼다는 겁니다. 사실 그 여유는 어쩌면 우리의 자신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이라면 이곳 대한문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보다 넓은 공간에서 우리가 체험한 희망을 증거 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그 희망을 위해서 이곳 대한문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생각, 같은 꿈을 꾼 동상일몽(同床一夢)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상일몽(異床一夢) 서로 다른 자리인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같은 생각, 같은 꿈인 우리 모두의 희망을 만들어 나아가야겠습니다.

 

   

수도원 정문에는 낡고 초라한 우편함이 있습니다. 낡고 초라한 우편함이라고 해서 꼭 슬픈 소식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초라한 우편함이지만 그 안에는 기쁜 소식도 있습니다.

 

하물며 고귀하고 존엄한 가치를 지닌 인간 역시 행색이 초라하다고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슬프게만 살아갈 이유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더 위로를 받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위해 노력하며 겪어야 했던 시련 때문에 희망을 과거의 아픈 추억으로 가둔다면, 그 시련을 겪고 싶지 않아 희망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현재로 만족한다면, 희망을 만들기 위해 겪어야 할 것들을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련으로 두려워한다면 희망은 그저 지나간 아픔이며 그저 혼자만의 만족이며 그저 두려움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함께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얼 가져서 희망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나눔으로써 함께 희망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지울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희망, 그 희망을 마냥 바라는 게 아니라 함께함으로써 얻는 희망, 그렇게 얻는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한 아름을 안고 희망의 사도가 되어 파견을 앞두고 있는 참으로 중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살아감을 말합니다. 살아감은 처해진 상황이나 조건과 가진 게 적고 많음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오직 존재 자체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말합니다. 그러한 희망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여정은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좀 더 거룩하고도 결연하게 선포하며 파견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가 희망이듯 교회와 세상의 희망인 여러분 가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희망, 진정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갑시다!!!”

 

우리 모두의 뜻인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한 이 땅에 모든 해고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 중에 언제나 기억할 것이고, 쌍용차 해고노동자 여러분들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잃는다는 건 우리의 희망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잃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마지막 대한문 매일미사 봉헌 

 체감온도 -3.6°C, 급기야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가 흩날렸다. 코가 빨갛게 변한 수녀들과 하얀 사제복 위 겨울옷을 껴입은 신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18일 오후 630,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매일 미사의 모습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주최로 열린 이날 미사에는 70여 명의 신부를 포함해 평소보다 많은 600여 명이 참석했다. 간이의자 외에 바닥에 깐 돗자리도 가득차 결국 많은 이들이 서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48일부터 225일간 이어져 온 대한문 앞 매일 미사가 이날을 마지막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쌍용차범국민대책위는 지난 16, 2009년 사측으로부터 해고당한 후 사망한 쌍용차노동자·가족 24명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면서 대한문 앞 분향소를 17개월만에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앞으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이제는 해고자 문제에 대해 사측이 답할 차례라는 이유에서다.(오마이뉴스 기사 일부 발췌)

 

 은총과 사랑이 넘쳐난 225

 

                                                 11월 18일 강론

나승구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어제가 보름이었습니다. 장동훈 신부님께서 마지막 공지사항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건너편 건물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문득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달이 전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추수를 마친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형은 동생을 생각하고, 동생은 형을 생각하여 볏단을 들고 서로에게 전하다가 길 한 가운데서 마주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잠 못 이루던 아이는 달에게 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살아갈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기를 기원하며 잠에 빠져듭니다.

 

 

오늘 미사로 지난 4월부터 지속되었던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을 위한 매일 미사가 일단락됩니다. 아마도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은 달이 전한 이야기의 형제의 마음으로 대한문의 분향소를 평택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날은 추워지고 발걸음은 총총거려지는데 계속 되는 미사로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너무 부담을 많이 준 것은 아닐까? 이제는 우리의 싸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지만 이제 그들 갈 길 가도록 놓아주자고 결정하였을 것입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어려웠던 그분들이, 그래서 함께 살자고 외쳤던 분들이 밤을 지새가며 고민하였던 결정입니다. 그만큼 건강해졌다고 저희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볏단을 나르던 또 다른 형제의 마음이 저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이 밤 어찌 보낼까? 비가 오면 그 차디찬 바닥이 얼마나 서러울까? 걱정하며 함께 잠 못 이루고 지냈던 지난 8개월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과 그들을 지탱해주기에는 너무나 무능했던 사제들이, 그리고 선의의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기웃거리며 길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문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자리에서 은총과 사랑이 넘쳐났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났고, 더 나아가 사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있다면 이 억울한 처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냐고 따지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크고 큰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은 눈 먼 이를 눈뜨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눈먼 이의 도시입니다. 모두가 두 눈 부릅뜨고 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웃의 고통도, 억울한 이의 참담한 처지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 애써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내버려진 참담함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는 나는 아프지 않다고, 나는 괜찮다고 위안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도 같은 처지에 떨어지고 말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눈을 감습니다 

이처럼 보지 못하던 우리의 눈을 이제 하느님께서는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형제의 아픔은 결국 나 자신의 아픔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먼 이의 안락을 누리던 우리들이 이제 눈을 뜨고 고통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뜰 수 있었던 이 눈이 언제 또 감길지 모르겠습니다. 눈먼 이의 안락함이 너무도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는 눈 감지 않기를 약속하는 자리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우리를 초대해 준 쌍용자동차 형제들이 우리를 볼 수 있도록 해준 하느님의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선한 영혼의 수녀님들, 수사님들이 어렵게 뜬 눈을 지탱하도록 부축해 준 하느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매일 미사를 참석해 준 교우들이 눈 똑바로 뜨라고 밝은 빛을 비춰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신앙을 달리하거나 믿는 바가 없더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함께 해준 시민들이 우리를 받쳐준 선한 지팡이였습니다.

 

그 모든 분들을 통하여 은총에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그 하느님께서 선한 지향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든 일에 앞으로도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 함께 해 주신 동료 사제들 고맙습니다.

 

 

 

 

노틀담수녀원 종신서원준비반 수녀님들의 특송

 

2시간이 넘는 동안 길에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 큰소리로 외치며 노래부르던 사람들의 가슴속에선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솟아 올랐을 것이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누가 손잡고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만으로 모여 미사를 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매일처럼 저 거리에서 저들을 위해 미사드리고 기도하였을 모든분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쌍용차 해고자 상담센터 ‘와락’을 만든 정혜신 박사는 “대한문 앞에서 이뤄지는 미사는 해고자들을 보이지 않게 살리는 행위”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현진 기자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위한 상담으로 시작된 상담센터 ‘와락’의 경험을 소개하며, 해고 문제는 정책과 제도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가정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가 된다고 강조했다.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부인들의 집단상담 내용 중 일부를 소개했다.

“남편은 소파에 있고 나는 안방에 있었는데 내내 울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제가 옷장에서 남편 넥타이를 꺼내서 묶고 안방 쓰레기통을 뒤집어 그 위에 올라가 목을 매고 있더라고요. 조금만 늦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었죠.”

“이제 2학년이니까 다른 아이들 얘기를 막 하는 거예요. 학교에 간식 넣어달라고…. 철없는 아들놈한테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른 거 핑계로 애를 막 때렸어요. 그냥 못 해주면 말지 왜 때렸나 싶어요. 애를… 제일 어리고 만만한 상대니까 화풀이를

하는 거죠.”

정혜신 박사는 2009년 쌍용차 해고자들이 공장에서 겪었던 폭력, 동료들의 죽음과 오랫동안 지속된 해고 상황 등에 대한 분노, 억울함, 무력감 등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죽음에 대한 충동, 폭력 성향 등 다양한 후유증을 낳고 있으며, 이는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는 “정리해고는 기업 차원의 노사문제, 정책의 문제만이 아니”라면서,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하나의 정책이 한 사람, 한 가정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알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살렸던 마음은 ‘나눔’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쌍용차 해고자들이 어느 날부터 자신들에게

닿는 연대의 손길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했다면서, “상처받은 이들이 다른 상처받은 이들을 만나 서로 치유하고 치유 받으며 함께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대한문에 오고 나서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고요.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대한문에서 쌍용차 해고자들과 함께 있어 주는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사람을 살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 정혜신 박사는 이런 ‘나눔’과 ‘연대’가 사람들을 살린다면서, “늘 옆에 있다는 것, 내 마음을 아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느낌이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면서 “천주교의 미사가 강력한 ‘생명줄’이 되고 있다. 함께 마음을 나눴던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댓글 2

  • 2013년 11월 21일 오전 12:12

    잘 읽고 갑니다.^^

  • 2013년 11월 30일 오후 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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