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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언약 법정스님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각박해질수록 이름도 성도 기억하기 어려운 온갖 법률이 쏟아져 나와 우리를 얽어맨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토록 많은 규제가 꼭 있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서슬이 퍼런 법률이 제정 공포되면 세상이 평온해져야 할 텐에, 오히려 시끄럽고 극악한 범죄가 날로 늘어 가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나라가 부패하면 할수록 거기에 비례해 법률이 늘어난다고 한 타키투스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무수한 그 법으로 해서 얼마나 많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 우리들은 법 없이 잘 살았던 옛사람들이 부러 울 지경이다. 산길을 걸어가노라면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까 하여 돌무더기나 나뭇가지로 표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길에 선 사람들은 그와 같은 표시가 얼마나 고마운 길잡이인가를 알아차릴 것이다. 언어나 문자를 빌리지 않고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표시는 우리를 규제하기는 커녕 감사하게 한다. 약속도 이렇 듯 인간적인 신의에 바탕을 둘 때 신성한 것이다. 언젠가 은사인 효봉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선사가 젊은시절 훨훨 떨치고 남과 북으로 운수행각을 할 때, 한 암자에는 예전부터 말 없는 언약이 지켜져 내려왔다. 지대가 높고 인적이 미치지 않는 그 암자에서 선승들은 여름 한철은 착실하게 정진할 수 있었다. 시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봄에 가서야 걷히므로, 시월 중순께가 되면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선사가 여름철 안거를 하기 위해 그 암자에 도착했을 때, 빈집에 양식과 장작이 쌓여 있고 뒤 뜰에 묻힌 독에는 김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선사는 그 여름을 먹고 땔 걱정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하산하기에 앞서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하여 그 전처럼 양식과 김장을 마련하고 땔감을 해두었다. 몇해가 지난 후 다시 그곳에 가 보았더니 누군가가 지낸 흔적은 있었지만, 양식과 땔감은 여전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귀에는 까마득한 신화나 이끼 낀 전설처럼 들려오지만, 그 시절 암자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런 가풍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말 없는 언약이었다. 서로가 믿고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신의에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강제성도 제재도 따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착한 의지가 작용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이 같은 사람을 몯 미더워하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풍토에서는 아무리 약속을 다짐하고 두껍고 질긴 종이에 서명 날인한다 할지라도 저 말 없는 언약에 미칠 수 없다. 얼마 전 지리산 등반길에 해발 1천 7백 고지나 되는 외딴 암자에서 묵고 온 일이 있다. 넓지도 않은 방 안 벽장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고봉정상에서 잃어버릴 게 무엇이기에 쇠를 채워 놓았을까 싶어서였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말 없는 언약이 이행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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