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에

2013. 11. 17. 오후 6:00:10

글자

 

 
 

 

              말없는 언약  법정스님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각박해질수록 이름도 성도 기억하기 어려운 온갖 법률이 쏟아져 나와 우리를 얽어맨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토록 많은 규제가 꼭 있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서슬이 퍼런 법률이 제정 공포되면

  세상이 평온해져야 할 텐에, 오히려 시끄럽고 극악한 범죄가 날로 늘어 가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나라가 부패하면 할수록 거기에 비례해 법률이 늘어난다고 한 타키투스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무수한 그 법으로

  해서 얼마나 많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 우리들은 법 없이 잘 살았던 옛사람들이 부러

  울 지경이다.

     산길을 걸어가노라면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까 하여 돌무더기나 나뭇가지로 표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길에 선 사람들은 그와 같은 표시가 얼마나 고마운 길잡이인가를 알아차릴 것이다. 언어나 문자를 빌리지 않고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표시는 우리를 규제하기는 커녕 감사하게 한다. 약속도 이렇

  듯 인간적인 신의에 바탕을 둘 때 신성한 것이다.

     언젠가 은사인 효봉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선사가 젊은시절 훨훨 떨치고 남과 북으로 운수행각을 할 때,

  한 암자에는 예전부터 말 없는 언약이 지켜져 내려왔다. 지대가 높고 인적이 미치지 않는 그 암자에서 선승들은 여름

  한철은 착실하게 정진할 수 있었다. 시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봄에 가서야 걷히므로, 시월 중순께가 되면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선사가 여름철 안거를 하기 위해 그 암자에 도착했을 때, 빈집에 양식과 장작이 쌓여 있고 뒤

  뜰에 묻힌 독에는 김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선사는 그 여름을 먹고 땔 걱정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하산하기에 앞서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하여 그 전처럼 양식과 김장을 마련하고 땔감을 해두었다. 몇해가 지난

  후 다시 그곳에 가 보았더니 누군가가 지낸 흔적은 있었지만, 양식과 땔감은 여전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귀에는 까마득한 신화나 이끼 낀 전설처럼 들려오지만, 그 시절 암자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런

  가풍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말 없는 언약이었다. 서로가 믿고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신의에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강제성도 제재도 따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착한 의지가 작용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이 같은 사람을 몯 미더워하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풍토에서는 아무리 약속을 다짐하고 두껍고 질긴 종이에 서명 날인한다 할지라도 저 말 없는 언약에 미칠 수

  없다.

     얼마 전 지리산 등반길에 해발 1천 7백 고지나 되는 외딴 암자에서 묵고 온 일이 있다. 넓지도 않은 방 안 벽장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고봉정상에서 잃어버릴 게 무엇이기에 쇠를 채워

  놓았을까 싶어서였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말 없는 언약이 이행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댓글 2

  • 2013년 11월 17일 오후 6:52

    가울의 끝이면 더욱 고독하고 스산한 겨울이 오겠군요.더욱 완벽한 편집에 음악에 마쳐 ;사진도 잘 골랐네요.편집하시느라고 수고 좀 하셨겠습니다.재주가 훌륭하십니다.잘 감상했습니다.

  • 2013년 11월 19일 오후 2:37

    지난주 초에 1년만에 올림픽공원 나들이하고 찍어온 사진인데, 사진양이 많아서...이책 저책 뒤져보다가 만들어봤습니다. 이틀동안 꼼짝없이 집중했나봐요.. 관심갖고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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