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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올바른 권위 사용법> 너무 오랜 세월 일인독재 치하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우리 민족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일부몰지각한 지도층 인사들로 인해 그런지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권위의 사용방법을 바라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권위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권위였습니다. 겸손하신 하느님이 예수님 권위의 원천입니다. 힘으로 내리누르는 권위라면 그릇된 권위입니다. 그릇된 권위입니다. 이웃을 힘들게 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게 만들며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다면 분명히 그릇된 권위입니다. 풀어나가는 권위라면 참된 권위입니다. 참된 권위를 실천하고 싶다면 교황님께서 방한하신 후 출국하시기 전까지의 4박 5일간의 행보와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을 하나 하나 반추하다보면 즉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루카 4,31-37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려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의 영이 예수님께 울부짖습니다. 이 울부짖음은 두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영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울부짖음은 결국 예수님의 영역과 마귀의 영의 영역은 다르고, 그저 각자의 영역에 머물러 각자의 일을 하자는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영의 교묘한 타협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벗님들께서는 마귀의 영의 이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과연 나는 마귀의 영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2000년 전의 마귀의 영의 교묘한 술책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암암리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바로 ‘세상’과 ‘교회’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와 ‘세속의 삶’과 ‘신앙 실천’의 분리 안에 말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실까요? 요한 묵시록 21장 3절은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 세상과 단절된 채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며, 마침내 때가 이르러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소 사람이 되시어 인간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구원은 “의인들이 죽은 다음 얻는 새 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경제와 노동,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사회와 정치, 국제공동체, 문화와 민족 간의 관계와 같은 실재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도 현존합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1항).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이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나누는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과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되었고 계속해서 모든 사람 가운데서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60항).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를 가두거나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인간에게 열려 있고, 인간에게 다가가며 인간을 지향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인간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역사적 환경 안에서 인간을 찾아 나서고 발견하는 착한 목자의 생생한 표상으로서 인간 가운데 존재합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86항).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 교회는 선택된 작은 그룹의 사람들만을 품을 수 있는 그런 작은 경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집입니다. 우리는 보편교회의 품을 우리의 미지근함을 보호해주는 어떤 둥우리 정도로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La Civiltà Cattolica」대표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 2013, 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적 구분은 비그리스도교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귀중한 구성원으로서, 아니 교회로서 믿음의 벗님들은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마치 거룩한 하느님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이 구분되는 듯 주장하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마귀의 영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단호하게 이 마귀의 영을 물리침으로써 온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하느님의 권능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의정부교구 성소국장) ~~~~~~~~~~~~~~~~~~~~~~~~~~~~~~~~~~~~~~~~~~~~~~~~~~~~~~~~
지금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더러운 영이 무엇인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처와 욕망에서 자라난 병든 영들에 사로잡혀 있을뿐더러 시대 전체를 휘감으며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생명을 앗아 가는 악한 기운에도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내적 회심으로 이끄는 기도와 성찰만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뿌리 깊은 시대의 병든 부분을 식별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호소하는, 현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영적 삶을 위한 터 잡기입니다. 특히 사회 병리적 현상과 왜곡된 시각들에서 한 개인이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기나긴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때때로 예술가들의 예언자적 직관에서 발견하는데, 그 좋은 보기가 19세기 미국의 작가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소설은 ‘근대적 삶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면서도 참으로 순수한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작가는 뉴욕 월가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주인공의 ‘하고 싶지 않다’라는 ‘부정’의 대답으로 ‘근대적 삶’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부정’의 원인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조금은 수수께끼 같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큰 여운을 남깁니다. “바틀비는 워싱턴에서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되었다. (중략) 사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절망에 빠져 죽었고, 희망적인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구제받지 못한 불행에 짓눌려 죽었다. 생명의 임무를 받아 나섰건만 편지들은 죽음으로 질주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더러운 영’은, 눈에 보이는 업적에 도취되고 풍요의 그늘에서 ‘배달되지 않는 편지’에 희망을 상실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서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살아 있는 영을 찾을 때 비로소 ‘더러운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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