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3)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칭찬하시네요. 축하드립니다.
칭찬은커녕 야단맞을 짓만한 것 같은데요...
그런 심정이지요?
여러분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별로 한 일도 없다 생각하니 죄스런 마음이 먼저 들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런 큰일, 좋은일을 많이 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내 가족 식구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회사 나가 돈 벌어오고... 그렇게 하였다고 칭찬하시는 겁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여러분이 이쁘다 하시네요.
그러니 죄스러 마시고 기뻐하십시오.
오늘도 신나게
하느님께서 섬기도록 맡긴 식구들을 위해 일하고 땀흘립시다.
그분이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시니까요.
오늘도 화이팅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작은형제회/산청 성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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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동창 신부가 단식을 한다고 하기에 광화문엘 갔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 정치인들, 영화인들, 시민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와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굵은 비가 내렸습니다.
무엇이 사랑하는 동창이 단식을 하게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엇이 평범한 시민이 50일 가까이 단식을 하게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엇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단식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단식은 요란한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단식은 화염병과 돌을 들지 않습니다.
단식은 폭력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식은 결연함을 보여 줍니다.
단식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단식은 욕심과 욕망 때문에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어찌 보면 무모한 행동입니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식은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표징입니다.
‘권력, 명예, 재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는 결코 하느님께 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하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약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부족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 빈손으로 보내시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한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사제와 수도자들 보았습니다.
말없이 단식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외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기꺼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분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곳간을 가득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지와 같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남을 속이고 양심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장의 잔고는 늘어가고, 더 좋은 집은 가질 수 있지만
어쩌면 그런 분들이 가졌던 ‘달란트’마저 빼앗겨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달란트’를 나를 위해서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달란트’를 남을 위해서 나누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 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 나눔과 봉사는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서울대교구 성소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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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읽으며 웃지 못할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학교 가기 싫다는 아들을 깨우려 합니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들은 싫다면서 이렇게 이유를 댑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첫째 거긴 너무 시시하고,
둘째 아이들이 성가시고, 셋째 전 학교가 싫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타이릅니다.
“그래, 그럼 난 네가 왜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해 주마.
첫째 그건 네 의무고, 둘째 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고, 셋째 넌 교장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가르침은 늘 깨어 있으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받은 ‘재능’에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는 그것을 귀찮은 짐으로,
또는 두려운 과제로 여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충만하고 행복하게 이끌도록 부여하신 내적 자질과 기회가
언제나 만사형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주 진지한 의무, 큰 위험이나 희생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움츠리고 도망가거나, 선물이자 사명인
그 재능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한 삶을 위한 출발은 다름 아니라
그러한 수고와 풍파 속에
인생의 참맛과 보람이 숨겨 있음을 깨닫는 것이겠습니다.
(최대환 세례자요한 신부님/의정부교구 정발산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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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오.25,29)
탈렌트의 비유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량대로 성실하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다양한 역량은 이 땅에서 우리가 사용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선물입니다.
우리 개인의 선물됨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 초대장입니다.
예수님 시대를 지나서 개인 윤리를 강조하던 철학사상은 많은 탈렌트를 벌은 사람을
성실한 사람으로 땅에 묻어 둔 사람을 불성실한 사람으로 만들면서
개인 내면의 성실성을 강조하였기에 착하고 충실한 종이 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한편, 탈렌트의 비유는 예수님 시대의 억압당하던 민중들을 대상으로
비유로 들려주신 경제 제도적 잔학성을 고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열 탈렌트로 열 탈렌트를, 다섯 탈렌트로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로 두 탈렌트를
폭리를 취하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땅에 대한 투자는 가장 정직한 투자였습니다.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둔 것은 부당한 폭리를 취하지 않고
정당하게 땅에 투자한 경제 활동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그러한 정당한 투자를 하면 모두를 잃게 되는 부조리한
경제사회제도를 풍자를 하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사회 구조를 예수님은 거부하셨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고 정당하게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강조하십니다.
삶의 여정 길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많이 가져야 할 필요가 없고
‘여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은 탈렌트를 가지고 늘리고 사용함으로써 하늘나라의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탈렌트라도 정당하고 성실하게 사용함으로써 하늘나라의 행복은 찾아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예수성심전교수도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