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사도행전 16,11-15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가 거기에서 다시 필립비로 갔다. 그곳은 마케도니아의 첫 지방의 도시로서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안식일이 되어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가 유다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주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오로의 말을 귀담아듣게 하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정말 저를 주님의 충실한 신도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면서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복음 요한 15,26─16,4ㄱ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짓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은 ‘프랑스 혁명’을 무려 4년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어느 날,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이자 저명한 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 그 원고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칼라일은 거리낌없이 친구에게 자신의 방대한 원고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밀이 집을 비운 사이 하녀가 원고를 난로에 집어 넣어 버린 것입니다. 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를 하자 칼라일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걱정말게. 그런다고 불타 버린 원고가 다시 되살아날 리도 없지 않은가? 내 다시 쓰도록 하자.”
그리고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묵묵히 집필에 매달린 지 3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친구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바로 늘 감싸 안고 웃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이러한 친구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이라는 친구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께 죄를 지어 힘들어 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를 감싸주면서 힘을 주는 친구. 그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성령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내게 도움을 전혀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인양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이런 획일화되고 좁은 사고가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과 동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판단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보편적인 것이라면서 ‘진리’라고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2000년 전의 사람들도 이런 획일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이라는 틀 속에서 그들은 '진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은 바로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때문에 주님의 뜻이 100% 담겨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율법의 조문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자신들이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을까요?
그렇기 때문에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친구,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즉,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래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우리에게 오셨지만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숨을 쉬면서 이 세상 안에서 잘 살고 있어요. 숨을 쉰다는 것은 공기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그 공기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살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이 세상을 살 수 없겠지요. 그런데 그 공기라는 것이 눈에 보이나요? 꼭 필요하다는 그 공기가 눈에 보여서 '지금 공기 10만개가 내 코로 들어오는구나. 그래서 숨을 쉴 수 있구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래서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우리들은 매 순간 공기를 마시듯이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성령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하지 않듯이,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성령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도 주님을 찾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친구를 소중히 여깁시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법정 스님) 삶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심지어 참으로 잘한 결정이거나, 너무 잘못한 결정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있고, 오답도 될 수 있는 거지요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는 것이습(習)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모두가 정답이 될 수도 있고 모두가 어느 정도 오답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나온 삶을 돌이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지난 삶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정답이 아니었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정확히 내 자리가 맞습니다
결혼을 누구와 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것이며 대학을 어디를 갈까에 무슨 정답이 있겠고, 어느 직장에 취직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때 그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그때 또 그때...한없이 삶의 오답을 찾아내려 하지 마세요 정답, 오답 하고 나누는 것이 그 분별이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지 우리 삶에는 그런 구분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어느 길이든 정답 오답 나누어 정답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냥 다 받아들이면 그대로 정답인 것입니다 정답 아닌 정답이며, 오답 아닌 오답인 것이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