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5,04,23) - 부활 제4주간 토요일

2005. 4. 23. 오전 8:20:03

글자
2005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13,44-52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이 거의 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그 군중을 본 유다인들은 시기심이 북받쳐서 바오로가 한 말을 반대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하게 이렇게 대꾸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나는 너를 이방인의 빛으로 삼았으니, 너는 땅 끝까지 구원의 등불이 되어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바오로의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방 출신으로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귀부인들과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두 사람을 쫓아냈다. 두 사도는 그들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 안티오키아의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복음 요한 14,7-14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





옛날 어느 수도원의 원장님은 많은 제자 중에 특별히 한 제자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잘 생기고, 또 머리도 좋은 그런 제자가 아니라, 가장 못 생기고 또 가장 잊기를 잘하는 기억력도 엄청나게 흐린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를 사랑하는 원장님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를 못했고, 원장님께서 그 제자만을 편애한다고 늘 불만이었지요.

이런 불만이 점점 붉어질 무렵, 원장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모은 뒤에 새 한 마리씩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는 이 새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 가지고 다시 이 자리로 다시 모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원장님의 말씀에 따라 모두 새를 죽여서 원장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쏟고 있는 그 제자만은 산 새를 들고 온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면서 비웃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빙긋이 웃으면서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도 하느님께서는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차마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원장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이다.”

사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늘 이 세속적인 기준들이 우리 판단의 척도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그 기준으로 얼마나 많은 판단과 단죄를 했는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말하고 또 판단하는 그 세속적인 기준들로 우리들을 바라보실까?’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눈에는 ‘대단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주님 앞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늘 밝게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왜 특별한 사랑을 주실까요? 그 사람의 어느 부분이 예뻐 보여서일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돈이 많아서?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어서?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들의 판단 기준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속적인 기준으로써만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다른 이들만 사랑을 받는다고 원망하지 맙시다. 대신 나 역시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 즉 사랑의 실천에서만 가능합니다.


풀 한포기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나라 사랑하는 방법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느 날 훈화 시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질문하셨다.

학생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교장 선생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사람들은 누구죠? 어른들인가요?"
"아니요." 시답잖다는 듯 학생들의 말 속에는 힘이 없었다.
"그럼 누군가요?"
"네, 아이들입니다."
영문을 모른 채 힘없이 대답하는 학생들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짓던 교장 선생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이으셨다.
"네, 맞습니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사람들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하철 안이나 버스 안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아이들에게

인상을 찌푸리면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웁니다." 이번에는 모두들 경험한바 있다는 듯이 학생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애국의 길은 바로 언제 어디에서나 아이들에게

밝은 얼굴로 미소짓는 일입니다. 밖에서 만난 사람들이 거칠게 대하면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마음에 벽을 쌓게 될 것이고 아무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향해 웃어 주는 사람들을 보고 자란 아이는 항상 열린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밝게 자란 아이들이 만든 사회는 밝을 수밖에 없겠죠?"
어리둥절해 하던 학생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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