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5,04,10) - 부활 제3주일 가해

2005. 4. 10. 오후 2:25:56

1
글자
2005년 4월 10일 부활 제3주일 가해

제1독서 사도행전 2,14.22ㄴ-33
[오순절에,]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에 관해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오니, 나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뵈오며,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치고, 내 혀는 즐거워 노래하며, 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 것입니다.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선조이신 다윗에 관해서 분명히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땅에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예언자로서 하느님께서 자기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며,‘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제2독서 베드로 1서 1,17-21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복음 루가 24,13-35
[안식일 다음 날] 거기 모였던 예수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이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사제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 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과연 그 여자들의 말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들은 곧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 보았더니 거기에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지에서의 하루 일과는 화장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성지에서 하는 일 중에서 첫 번째 일은 바로 화장실 청소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저께 아침이었습니다. 글쎄 남자 소변기 안에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형제님께서 일을 보시다가 소변기 안에 100원짜리 동전을 떨어뜨렸나 봅니다. 그리고 소변이 묻었기에 그 동전을 줍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신이 떨어뜨린 것을 모를 수도 있겠지요. 저는 그 100원짜리 동전을 보면서 문득 이런 장난기가 발동되더군요.

‘이 동전을 주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저는 그 동전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동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동전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100원짜리 동전을 하나 얻기 위해서 소변 묻은 곳에 손을 넣기 싫었나 봅니다. 저는 그 동전을 꺼낸 뒤, 이번에는 사람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곳에 그 동전을 얹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 가보니, 그 동전은 사라졌더군요.

소변기 안에 있었던 동전이라고 ‘이건 더러우니까 90원의 가치밖에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지요. 소변기 안에 있는 100원이나, 깨끗한 곳에 놓여 있는 100원이나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단지 위생상의 문제를 들어서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그 위생상의 문제라는 것은 또 어떤가요? 지금 현재 소변기 안에 있는 100원이나, 지금은 소변기 안에 놓여 있지 않으나 꽤 오랫동안 소변기 안에 있었던 100원이나 위생상의 문제는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 현재 깨끗하냐 더럽냐의 시각적인 차이를 두고서 취하고 또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시각이란 이렇게 제한적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신의 시각만 옳다고 생각을 하고, 그 시각적인 이유를 들어서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엠마오로 함께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아마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 죽음, 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기준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세 차례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부활에 대한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신 인간적인 시각적 기준에 맞추어서만 판단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는 순간이 언제였는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순간은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눌 때였습니다. 바로 평범한 일상의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알아 뵐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나타나신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주님을 찾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내가 어려움 중에 있을 때, 내가 필요할 때에만 찾는 주님일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이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특별한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늘 감사할 수 있고, 그 힘으로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한 어떤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 일상 안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합시다.



처음의 좋은 느낌

우리가 무언가에 싫증을 낸다는 것은 만족을 못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처음 가졌던 나름대로 소중한 느낌들을 쉽게 잊어가기 때문이죠.

"내가 왜 이 물건을 사게 됐던가"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게 됐던가"
"내가 왜 그런 다짐을 했던가"

하나 둘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그 처음의 좋은 느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은 변화합니다. 늘 같을 순 없죠. 악기와도 같아요.

그 변화의 현 위에서 각자의 상념을 연주할지라도 현을 이루는 악기자체에 소홀하면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변화를 꿈꾸지만 사소한 무관심,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이따금 불협화음을 연주하게 되지요.

현인들은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까이 있다"
그런것 같아요. 행복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닌것 같아요.

지금 눈을 새롭게 뜨고 주위를 바라보세요.
늘 사용하는 구형 휴대폰, 어느새 손에 익은 볼펜 한자루, 잠들어 있는 가족들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 사랑했던 사람, 지금 사랑하는 사람.

먼저 소중한 느낌을 가지려 해 보세요.
먼저 그 마음을 되살리고 주위를 돌아보세요.
당신은 소중한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속상해 하지 마세요.

우리가 소중하게 떠올렸던 그 마음.
그들로 인해 잠시나마 가졌던 그 마음.
볼펜을 종이에 긁적이며 고르던 그 마음.
처음 휴대폰을 들구 만지작 거리던 그 마음.
그 마음을 가졌었던 때를 떠올리며 엷은 미소를 짓는 자신을
찾을줄 아는 멋진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선물해요.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선물해요.

"오늘 옷 잘 어울려요." 먼저 웃으며 인사해요.
"좋은아침!" "너 참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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