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5,02,24)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05. 2. 24. 오후 5:46:46

글자
2005년 2월 24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 17,5-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소금쩍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뙤약볕만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살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사람의 마음은 천 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주님인 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복음 루가 16,19-31
그때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즘 제가 고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째 계속되고 있는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새벽 메일을 이제 그만 발송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이지요. 물론 새벽 묵상 글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E-Mail로 발송하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E-Mail로 받아서 좋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왜 자신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냐고 항의를 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E-Mail을 보낸다고 심한 욕까지 하시는 분들도 상당수가 됩니다.

사실 이 새벽 묵상 메일 신청하신 분에 한해서 발송됩니다. 그렇다면 왜 저에게 E-Mail을 보낸다고 화를 내실까요? 자신이 신청하고서는 이런 메일 보낸다고 화를 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너무나 궁금해서 이러한 메일을 보낸다고 욕을 하셨던 분에게 이런 이유를 적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제 묵상 글을 받아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은 뒤에 신청 버튼만 누르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의 메일을 받으시는 분이 다른 분을 위해서 그 분의 E-Mail로 신청을 하셨던 것이고, 메일을 받으시는 분은 본인이 신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메일함을 채우는 저의 메일에 대해 화가 났었던 것입니다.

새벽 메일을 대신 신청해주신 분은 그분을 위해서 했겠지요. 자신에게 도움이 되니 그 분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그 내용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메일함을 채우고 있는 메일이 지긋지긋해졌던 것이고, 그래서 제게 욕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내가 좋은 것이 남에게도 좋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남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반대로 나에게 너무나 싫은 것이 남에게는 너무나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어떤 권고를 해 줄 수는 있겠지만, 강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늘 강요를 하곤 합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말하면서 하는 강요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들에게, 친구들에게, 부모에게 하는 수많은 강요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까? 강요를 받은 사람은 강요를 받았다고 상처를 받고, 강요를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몰라준다고 상처를 받고,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엉뚱하게 제3자도 상처를 받습니다. 앞서 E-Mail로 인해 상처를 받은 저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지상 생활에서 부유하던 생활을 하던 부자가 죽어서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가족을 위한 부탁을 합니다.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브라함은 거절을 합니다. 그 거절의 이유는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서 그러한 부탁을 했지요. 하지만 그 형제에게 그 부탁이 이루어진다고해도 본인이 진심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때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삶 안에서 직접 볼 수 있는 나의 행동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자기 역시 그런 실천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직접 모범을 보이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모습을 반성해봅시다. 혹시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남에게 강요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말로 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그 부자의 형제처럼…….


남에게 내 뜻을 강요하지 맙시다.



해보세요(하사랑 쉼터 좋은글 중에서)

한번쯤 "사랑해" 라고 해보세요
그리하면
정말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번쯤 "보고싶어" 라고 해보세요
그리하면 정말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끔은 "내가 있어 행복하지" 라고 해보세요
당신 때문에 정말 행복해질 겁니다

가끔은 "힘들지 않느냐"는 안부전화 꼭 해보세요
그리하면 그 사람 당신 때문에 살고 싶어질거에요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내가 서 있던 자리가
낯설고 외로움이 밀려들 때
당신도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뿌린 씨앗은 당신만이 거둘 수 있으니까요...
"네가 있어 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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