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7.09.18) -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2007. 9. 18. 오전 8:15:58

글자
2007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제1독서 티모테오 1서 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복음 루카 7,11-17
그때에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듣기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아까부터 계속 졸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졸고 있는 학생에게 갑자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순신 장군에 대해 얘기 해봐.

학생: 아, 순신이 형이요? 우리 형 친구인데요?

선생님: 그게 아니고 장군 이순신 말이야!

학생: 그 형이 장군 됐어요? 와~ 출세했네.

선생님: 아니, 장군은 돌아가신 지 오래 됐어!

그 질문에 이어지는 학생의 허무한 대답 때문에 반 아이들은 뒤집어졌습니다.

학생: 죽었어요? 안됐군요. 젊은 나이에……. 쯧쯧…….

어때요? 이 대화를 보시는 분들도 답답하죠? 물론 우스갯소리로 나온 유머이지만, 어쩌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들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싶어서 적어 보았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소리만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된 사랑을 주시려고 하는데, 그 사랑보다는 놀라운 기적만을 내게 내려주시길 바라는 또 그래야 하느님을 믿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어떤 외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지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뒤에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시하지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인데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적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그 큰 사랑보다는 두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느님만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외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시며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기보다는 기적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 이스라엘 사람처럼,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지길……. 그리고 그렇게 기적을 봐야지만 믿겠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결코 개인적인 영광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나만의 영광을 위한 기적을 원하는,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기적 자체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휘어지는 가지가 되라(바이취엔전, '인간관계 레시피' 중에서)

캐나다 퀘벡 주에 남북으로 뻗은 계곡이 하나 있다. 이 계곡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서쪽 산등성이에는 소나무, 측백나무, 당광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반해 동쪽 산등성이는 온통 히말라야 삼나무 일색이라는 점이다. 이 기묘한 절경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 유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 부부가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어느 겨울, 거의 파경 직전이던 부부가 과거의 애틋한 감정을 되살리고자 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이 계곡에 도착할 무렵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부부는 흩날리는 눈보라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람의 방향 때문인지 동쪽 산등성이에 서쪽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잠시 후 히말라야 삼나무 위에 두텁게 쌓인 눈이 나뭇가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탄력이 좋은 삼나무 가지가 아래로 휘어지더니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을 아래로 와르르 쏟아 냈다. 눈이 어느 정도 쌓이면 가지가 휘어졌고 이내 눈 더미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현상을 반복하면서 히말라야 삼나무는 눈보라에도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무의 가지들은 꼿꼿하기만 할 뿐 눈덩이의 압박에 못 이겨 툭툭 부러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동쪽 산등성이에도 여러 나무들이 함께 우거져 있었을 거예요. 다만 가지를 굽힐 줄 몰랐기 때문에 눈보라에 쓰러져 하나 둘 사라진 거겠죠."

울컥해진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강론 묵상 좋은글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