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7.09.08) -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2007. 9. 8. 오전 9:22:07

글자
2007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제1독서 미카 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복음 마태오 1,1-16.18-23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어느 젊은 수도자가 자신의 수도원에서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던 수도자에게 이러한 부탁을 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비법을 전수 좀 해주십시오.”

이 말에 오랜 시간 동안 수도생활을 했던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7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해왔지만, 단 하루도 평화를 얻지 못했네.”

평화를 얻는다는 것. 오랜 기간의 수도생활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평생을 가도 그 평화를 얻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렇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미워하고 싸우고 다투는 것이 아닐까요?

얼마 전, 성당의 헌화회 회원들이 제대 꽃 장식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꽃꽂이는 꽃을 그냥 대충 꽂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꽃을 꽂은 뒤에는 약간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는 다시 부족한 꽃을 꽂고 또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맞춥니다. 바로 앞에서는 전체적인 구도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스코리아라고 불릴 만큼의 아름다운 자매가 있습니다. 피부가 정말로 백옥같이 희어서 뭇 남성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피부를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바라본다면 과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이 자매의 콧구멍만을 본다면 어떨까요? “콧구멍이 너무나 예뻐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에 해당하는 것이지 어느 한 부분만을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에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약간의 거리감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한 비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어떠했나요? 항상 가까이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 확대하곤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찰 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부정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여유인 것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처럼 사람들을 가까이에 다가가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갖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철저히 뒤로 물러나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말이 안 된다고도 할 수 있는 예수님 잉태 소식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을 닮아야 합니다. 즉,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때 이 세상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으며, 그 어렵다는 인간관계의 발전도 가져올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판단하려 하지 말고, 조금 떨어져서 판단하도록 합시다.



모르고 지나가는 행복들('좋은 글' 중에서)



내 삶이 너무 버거워하며 생각이 들 때
오늘하루 무사히 보내 감사하다고..

가진 것이 없어 라고 생각이 들 때
우리 가족이 있어 행복하다고..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라고 생각이들 때
넌 괜찮은 사람이야.
미래를 꿈꾸고 있잖아 라고..

주머니가 가벼워 움츠려 들 때
길거리 커피자판기 300 원짜리 커피의
그 따뜻함을 느껴 보세요.
300원으로도 따뜻해 질 수 있잖아요.

이렇게 생각하지 못 하는 이유는
당신이 살아 숨쉬는 고마움을
때로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어 내일을
오늘보다 더 나으리라는 희망을
생각한다면 우리 행복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 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늪에 빠뜨리는!
무모함은 없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변하여진 당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답니다.

나는 자식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에너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말은 부정적인 말이겠죠.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좋은 말을 하면 그렇게 좋게 되어 질 것입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강론 묵상 좋은글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