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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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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콜로새 2,6-15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복음 루카 6,12-19
12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서 처음으로 본당에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에 지도신부로 쫓아간 적이 있었지요. 아마 강원도 어떤 계곡 옆의 캠프장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즐겁고 또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딱 한 순간을 빼고 말입니다. 그 한 순간은 바로 물놀이 시간이었습니다.
물놀이를 하러 계곡의 넓은 공간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수해 보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스무 명 되는 아이들이 저를 붙잡고, 저를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조금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이 순진한 아이들이니까 그냥 물속에 저를 집어 던지고 말겠지 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물속에 집어 던진 것은 물론 나오지 못하게 그래서 물을 잔뜩 먹을 수 있도록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를 위에서 누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말이지요(제게 무슨 원수 진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스무 명의 아이들을 제치고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힘세다는 것을 알았지요. 한 두 명도 아니고 자그마치 스무 명의 다 큰 아이들을 뚫고서 물 밖으로 나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 저의 힘은 그렇게 세지 않습니다. 바로 살겠다는 의지가 20명의 중고등부 아이들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살겠다는 절박한 의지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들다는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의지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런 의지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 바치는 간절한 기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기도야 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힘을 의심하시는 분들은 오늘 복음의 장면을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고, 고민하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잠깐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워가면서 고민 속에서 깊은 기도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보다 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하셨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과연 어떠한가요? 잠깐의 시간을 이용한 화살기도 몇 회로 나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앞서 살겠다는 의지가 순간적으로 힘센 나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 내어 기도합시다. 기도는 여유가 있을 때만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안병욱 '인생론' 중에서)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남과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세계라는 무대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이는 인생을 농사에 비유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하나의 예술 작품에 비유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책을 쓰는데 비유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우리는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의 길을 가는 인생의 나그네다.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이 가는 길은 인도요,
자동차가 가는 길은 차도요,
배가 가는 길은 뱃길이요,
바닷길이다.
우주에도 길이 있다.
지구는 지구가 도는 길이 있고,
별은 별이 가는 길이 있다.
옳은 길을 가되 우리는
적절한 속도,적절한 걸음걸이로 가야 한다.
군자는 인생의 큰 길,
옳은 길을 정정당당히 간다.
마음에 추호도
부끄러움과거리낌이 없는 사람만이
청천백일 하에 크고.
넓은 길을 늠름하게 활보할 수 있다.
힘차고 당당하게
걷는걷는 걸음을 활보라고 한다.
광명정대의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바로 사는 사람만이
정정당당한 자세로 태연자약하게
인생의 정도와 대로를 힘차게 걸을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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