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신] 교회사 연구와 성지개발에 '미친' 한약사 김진용씨

2000. 12. 8. 오후 2:06:41

글자

 

"하느님을 위한 일"에 절로 신명

교회사 연구와 성지개발에 '미친' 한약사 김진용(마티아)씨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가치관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김진용(72, 마티아, 인천 부평2동 본당)씨는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다.

 

부평에서 30여년째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본업보다 교회사 연구와 성지개발에 더 열정적인 사람이다. 본인 스스로 '미쳤다'는 말을 주저없이 꺼낼 정도로 그의 머리 속은 온통 교회사 연구에 대한 생각들로 꽉 차 있다.

 

 

골배마실 아닌 용인 한덕동

 

단순한 호기심 정도가 아니다. 철저한 문헌고증과 현지답사를 거쳐 내놓은 그의 논문이 전문가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았을 정도다. 그는 93년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에 관한 연구'란 논문을 통해 김대건 신부 가족의 피난지는 용인 골배마실이 아니라 용인 한덕동(寒德洞)이라는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교회사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가 "김대건 신부 가족이 솔뫼를 떠나 최초로 정착한 곳이 골배마실이 아니라 한덕동이라는 김진용씨의 연구는 사적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밝힐 정도로 그의 연구 결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각종 자료에 골배마실이 한덕동이라고 표기된 데 의문을 품고 시작한 것이 어줍지 않게 교회사 공부를 하게 된 계기입니다. 제 고향이 용인이라는 것도 요인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 성과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다. 역사와 교회사에 관심이 많아 젊은 시절부터 관련 서적을 탐독한 것이 밑거름이 됐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열성이 더 큰 몫을 했다.

 

수십 차례 현장을 방문해 구전으로 내려오는 얘기를 일일이 채록, 이를 밤을 새워가며 관련 문헌과 비교하는 검증작업을 벌였다. 김대건 신부의 족보를 샅샅이 파헤쳐 김대건 신부의 조부 묘소가 한덕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지명 확인을 위해 용인시청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든 노력 끝에 김 신부 가족의 피난지가 한덕동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 작업을 하는 동안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실묘(失墓) 상태로 전해져 오는 김대건 신부의 부친(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묘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96년부터 99년 11월까지 현지를 무려 13차례나 답사하고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은이성지 옆 묘와 굴암 소재 묘 2기가 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최종 결론은 유보했지만 이 역시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집념 하나로 일궈낸 성과이다.

 

교회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겁다. 83년 인천교구 평협부회장을 맡으면서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묘지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지난 98년 사재 3000만원을 털어 묘역 정비작업을 마쳤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한 일은 아니다. 오로지 신앙인으로서 한국교회 초창기의 대표적 인물인 이승훈 선생의 묘소를 누군가는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것 뿐이다.

 

"후손이 조상의 묘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더구나 우리의 신앙 선조가 보통 조상인가요. 그 무시무시한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은 실로 대단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분들의 열렬한 순교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 후에도 그는 98년 9월 은이공소와 미리내 사이에 있는 신덕·망덕·애덕 고개에 사재를 들여 비를 세우고, 변변한 안내판조차 없던 은이공소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성지관리와 개발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한약방을 운영하는 덕에 경제적 부담은 적었지만 수천만원이 넘는 돈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그는 아낌없이 내놓았다. 더욱이 갖고 있던 땅을 판 돈으로 한덕동 일대 603평을 매입해 수원교구에 희사했다. "이 늙은이의 힘이 이것 밖에 안되니 교구에서 이 땅을 갖고 성역화 사업을 해주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는 올바르게 쓰는 만큼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주저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이런 그의 희생이 알음 알음 알려져 지난해에는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다.

 

"하느님 사업에 돈을 쓰는데 주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봉헌했죠. 그런지 몰라도 세속사업인 한약방도 그럭저럭 잘되더군요. 모두가 주님의 은총이죠."

 

그는 남들이 갖지 못한 또 하나의 '달란트'를 갖고 있다. 순교자들의 삶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85년 해미성지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의 성지를 순회하면서 순교극을 공연했다. 순례자에게 순례의 참뜻을 심어주기 위해 시작한 순교극 공연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기 쉬운 성지순례를 한결 풍성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성지마다 앞 다퉈 그를 초청하는 바람에 각본을 쓰면서 공연에 출연하고 필요한 소품까지도 직접 챙겼다. 한마디로 '북치고 장고치고' 다한 셈이다. 그러나 한번도 고된 줄을 몰랐다. 하느님을 위해 스스로 '미쳐' 하는 일이라 절로 신명이 났다.

 

 

서소문 처형지 본격적 연구

 

요즘 그는 103위 성인 중 44명이 순교한 서소문성지에 몰두해 있다. 처형지가 어디라는 것은 대충 짐작하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고 싶어서다. 그는 벌써 고지도를 구하고 관련 기관을 찾아 자문을 구하는 등 본격적인 연구작업에 들어갔다. 또다시 그의 교회사 연구에 발동이 걸린 셈이다.

 

"힘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인 만큼 힘들거나 후회한 적은 없어요. 지금까지 바가지 긁지 않고 묵묵이 후원해 준 부인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교회사 관련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의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그 열정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복한 사람만이 갖는 여유와 진지함도 배어 있다.

 

<평화신문, 2000년 12월 10일 제606호,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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