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신유박해 성지순례(상)

2001. 7. 8. 오후 6: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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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특집] 신유박해 성지순례(상)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피서'도 당연히 떠올릴 계절이긴 하지만, 가뭄과 폭우로 농민들은 애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휴가를 떠난다면 200년전 신유박해의 참혹했던 현장을 찾아 순교자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도 뜻이 있을 것이다. 신유박해 순교터는 성지로 단정하게 조성된 곳도 있긴 하지만, 아무런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는 치명터가 대부분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순교현장에서 치열했던 순교신심을 기억하며 기도를 바치는 가난한 마음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서울대교구를 비롯해 전국 7개 교구의 신유박해 순교터를 순례하는 여름 특집을 2회에 걸쳐 마련한다. <편집자>

 

 

■ 서울대교구

 

신유박해는 조선의 첫 대규모 박해였던만큼 순교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피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1784년 조선교회 창립 이후 첫 외국인 사제로 국내에 들어왔던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회장 등 지도층이었던 평신도들이 대거 순교했다. 이들이 순교한 현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순교터는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지만 이밖에도 새남터, 포도청, 평동 등 기억할만한 순교터가 있다.

 

▲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 =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최창현(요한)회장, 최필공(토마스) 등이 1801년 2월26일 서소문에서 순교한 것을 시작으로 최필제(베드로, 음 4월2일), 정철상(가롤로, 음 4월2일), 강완숙(골롬바, 음 5월22일) 등 당시 조선교회의 중추적 인물들이 순교한 치명터다. 서소문 밖 네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아현고가도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추정하는 것이 교회사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현재의 호암아트홀에서 서쪽으로 15∼20m 지점. 그래서 한국교회는 84년 현재의 서소문 공원에 순교자 현양탑(임송자 작)을 세워 44위의 성인과 여타 순교자들을 기렸고, 이후 서울시 재활용센터 공사로 탑이 헐리자 다시 순교자현양탑(조광호 신부 작)을 세워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02-779-0753. 서울 중림동 성당, 02-392-5018, 362-1891.

 

▲ 새남터 성지 = 주문모 신부가 1801년 4월19일 (5월31일) 군문효수된 순교 현장. 새남터는 일명 '노들' 혹은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새남터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확인하기 어려우나 현재 철도청이 기관고로 사용하는 연무장 부지, 다시 말해 서울 용산역에서 한강 일대에 이르는 드넓은 새남터 중 철도기지창일 것이라는 것이 한국교회의 오랜 주장이고 서울 원효로4가 부근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고증이 어려운데다 그 부지의 확보마저 어려워 교회는 새남터 근처로 추정되는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확보하고 1950년 순교기념지로 지정했다. 1956년에는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1년 한강본당에서 새남터본당이 분리 설정됐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1983년 현재의 서울 용산구 이촌2동 199의 1에 대성전을 건립키로 하고 공사에 들어가 그 이듬해 완공했다. 성전은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의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과 전시관,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새남터본당, 02-716-1791.

 

▲ 포도청 = "사학징의"에 따르면, 신유박해 당시 조신행(1801년), 김이우(바르나바, 김범우의 아우, 1801년 5월께), 박중환(1801년 4월18일), 심아기(바르바라, 1801년 4월5일) 등 4명이 장을 맞아 순교했다. 그러나 서울의 포도청은 좌포청과 우포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신자들 역시 각각 좌·우포청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따라서 포도청 순교터는 두군데 모두 순교터로 볼 수 있다. 좌포청은 현재의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자리이고, 우포청은 서울 광화문 중앙우체국 옆에 위치한 구 동아일보 사옥 자리다.

 

▲ 서울 평동 = 평동 순교터는 '경기감영'이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평동 164번지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경기 관찰사가 관장하던 서울 서대문 밖 경기감영에서는 예비신자 조용삼(베드로)이 1801년 2월14일(양 3월27일)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했다. 여주 출신으로는 첫 신유박해 순교자다. 그러나 당시 조용삼과 함께 서울로 끌려왔던 이중배, 원경도 등의 신자들은 '해읍정법(亥邑正法, 모든 지방 신자들을 거주지로 압송해 처형토록 했던 명령)'에 따라 여주나 양근으로 다시 돌려보내져 순교했다.

 

 

■ 춘천교구

 

▲ 포천 = 포천의 신유박해 순교터는 '포천관아'로 알려져 있다. 포천관아는 현재의 포천군청에서 동쪽으로 3㎞ 정도 떨어진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현 군내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70m 지점에 있었으나 6.25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포천에서는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01년 2월26일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서 순교)의 아들인 홍인(레오) 순교자가 1801년 12월 27일(양 1802년 1월30일) 44세를 일기로 포천관아 옥중에서 순교했다. 포천본당, 031-534-0057.

 

 

■ 수원교구

 

양근 한강개(漢江浦)는 '한국천주교회의 요람'으로 꼽힌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와 대석리 대감마을을 포함하는 양근 한강개는 권철신(암브로시오)이 1776년을 전후, 윤유일과 김원성, 이총억,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홍낙민(루가) 등을 제자로 받아들여 녹암계를 형성한 곳이기도 하고 이후 이승훈(베드로)와 정약전, 이윤하(마태오), 이벽(요한) 등을 가르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1779년 겨울 앵자봉 아래(한강개의 남서쪽)에 있는 주어사에 모여 강학을 하면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게 되는 것이다. 신유박해 당시 양근과 여주에서 처형되거나 옥사로 순교한 신자들은 각각 12명(교회 기록에는 13명)과 8명이다.

 

▲ 양근 = 양근의 순교터는 '양근 관아의 문에서 서쪽으로 2리쯤 떨어진 큰 길가'(이기경의 "벽위편")로 기록돼 있다. 현재 양평군청 서쪽 200∼300m 지점(양근 4리)의 양평휴게소와 양평주유소 인근, 즉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놓여있는 일명 '오밋다리'(서울로 가는 다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유오(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은 1801년 3월 13일(양 4월25일) 양근에서 순교했다. 이어 윤점혜(아가다)는 5월 24일(양 7월 4일) 순교했고,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은 12월 27일(양 1802년 1월 30일) 순교했다.

 

▲ 여주 = 신유박해 여주 순교터는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 길가'(이기경의 "벽위편"). 현재 여주본당에서 남쪽으로 200m 지점으로, 여주 창리 구장터와 옥거리에서 가까운 로터리지역이다. 여주에선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임희영, 정종호 등 5명이 1801년 3월 13일(양 4월 25일) 순교했고, 정순매(바르바라)는 5월 24일(양 7월 4일) 여주에서 순교했다.

 

▲ 남한산성 =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최초의 신자는 한덕운(토마스)로, 1801년 12월27일(양 1802년 1월30일) 참수됐다. 정확한 순교터는 '남한산성 동문 밖'("벽위편", 현재의 동문 밖 주차장 자리)이다. 이후 남한산성 성지에서는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47위, 무명순교자까지 합쳐 300여위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남한산성 성지에서는 산성내 옥터나 포도청, 연무관, 저자거리, 동문과 수구문, 남문, 북문, 수어장대 등을 연결하는 4개의 순례코스을 개발 안내(단체)하고 있다. 남한산성 성지, (031)749-8522∼3.

 

<자료제공 및 도움말=김진소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신부, 차기진 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방상근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각 교구 본당 및 성지>

 

<평화신문, 634호(2001년 7월 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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