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역사신문] 조선교회 초대 여성회장 강완숙 등 9명 순교
[사진설명] 강완숙의 지도로 여성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해온 궁녀출신 동정녀 문영인(비비안나)이 우유빛 흰 피를 흘리며 순교하자 참수형을 집행한 형리들이 깜짝 놀라고 있다. <그림 탁희성>
1801년 7월 2일.
조선 천주교회의 초대 여성 회장인 강완숙(41, 골롬바)이 7월2일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날 서소문 형장에서는 강완숙과 함께 공동 신앙생활을 해 왔던 궁녀출신 강경복(수산나)와 문영인(26, 비비안나), 조풍산의 아내인 김연이(율리안나), 한신애(아가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또 최인철(최인길 마티아의 동생)과 김현우(김범우 도마의 아우), 홍정호(홍필주 필립보의 먼 친척), 이현(이희영의 조카)도 함께 순교했다.
강완숙을 비롯한 9명의 순교자들은 의금부에서 수레로 서소문 형장까지 호송됐으며, 형장에 끌려오는 동안 이들은 즐거운 낯빛으로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격려해 구경꾼들을 크게 감화시켰다.
강완숙은 사형 집행관에게 "여교우들에게 사형수의 옷을 벗기는 규정을 적용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 승락을 얻은 후 9명 중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했다.
조정으로부터 천주교인 중에서도 가장 간악한 요녀로 분류된 바 있는 강완숙은 금년 4월 6일 아들 홍필주(필립보)와 함께 체포돼 의금부에 수감됐으며 이날 순교할 때까지 6차례나 주리가 틀리는 큰 형벌을 받으면서도 굳건하게 천주 신앙을 고백했다. 그녀의 주리를 틀었던 한 형리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음색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고 몸서리쳤다.
약 한달 전인 5월 31일 주문모 신부가 순교할 때 갑자기 광풍이 풀고 검은 먹구름이 끼고 천둥 번개가 쳤던 것처럼 이날 9명의 순교자들의 처형장에도 이적이 일어나 형리들은 물론 구경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칼을 맞고 순교한 궁녀 출신 문영인이 우유빛 흰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군중들 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한 신자는 "천주께서 로마의 동정녀 순교자 성녀 마르티나에게 행하신 기적을 다시 내려 주셨다"고 기뻐했다.
또 이들 9명의 순교자들의 시신은 이튿날 큰비가 왔고, 삼복 더위에 여러 날 동안 형장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는데도 부패되지 않아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관의 명령의 받아 이들을 매장하러 온 매장꾼들은 "아홉 구 모두가 살이 성하고 얼굴이 불그스름하며, 피는 상처에서 몇 분전에 흘러 나온 것처럼 신선하고 굳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한편, 신자들은 이들 9명의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을 후세에 본받게 하고 교황청에 알리기 위해 목격증언을 기록했다(1811년 신미년 서한 참조).
<평화신문, 633호(2001년 7월 1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강완숙, 수도생활 형태 여성 신앙공동체 지도
1801년 7월.
강완숙(골롬바)이 수도생활 형태를 띤 여성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자신이 순교할 때까지 이끌고 온 것으로 밝혀졌다. 강완숙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여성들은 대부분 정결을 맹세한 동정녀들이거나 남편을 사별한 과부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금년 신유박해 기간 동안 천주교 신자들에 관한 형조와 포청의 문초 자료를 모아 펴낸 '사학징의'에 따르면 강완숙은 △ 자신의 딸인 홍순희(루치아, 동정녀, 배교하고 영광으로 유배) △ 윤점혜(아가다, 순교) △ 한신애(아가다, 강완숙과 함께 순교) △ 최운애 △ 강복혜 △ 김희인 △ 점복(권생원의 여종으로 배교하고 영해로 유배) △ 김월임(동정녀, 강완숙의 여종, 울산으로 유배) △ 정임(강완숙의 여종, 유배) △ 효명 △ 김연이(율리안나, 강완숙과 함께 순교) △ 유덕이(화순으로 유배) △ 문영인(비비안나, 궁녀, 강완숙과 함께 순교) △ 정순매(바르바라, 동정녀, 정광수의 누이동생, 순교) △ 이득임(동정녀, 이합규의 누이동생, 장흥으로 유배) △ 김순이(과부, 장연으로 유배) 등을 가르치며 이들과 공동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의 지도에 따라 일정한 규율을 지키면서 공동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하고, 성물과 성서, 교리서적을 제작, 보관하는 일을 맡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1795년 전후해 가톨릭에 입교해 동정신앙을 맹세했고,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서 동정을 지키기 어려워 신분이 알려져 있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옮겨와 청상과부로 위장하면서 동정 생활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주요 거처는 서울 후동(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강완숙의 집이었고, 때때로 서울 군기사 (軍器寺-현재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30번지 일대) 앞에 있는 김경애의 집과 창동(현 서울 중구 남창동)의 정약종 집을 공동체 시설로 이용해 왔다.
이들의 공동체 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한 교회 평신도 지도자는 "이들의 공동체 생활이 비록 교회법상의 조직적 신앙생활의 실천 기관인 여자 수도원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와 흡사한 동정녀들의 공동 집주 신앙 공동체였다"며 "신생의 조선 천주교회가 급속히 발전하는 데에는 이들 여교우들의 기도 생활과 전교 활동이 크게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강완숙 골롬바, 그녀는 누구인가
강완숙(골롬바)은 1760년 충청도 내포지방의 향반(낙향해서 여러 대 동안 벼슬하지 못한 양반) 집안에서 출생했다. 10세 때 불교에 뜻을 두었으나 얼마 안가 포기하고 충청도 덕산에 살던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을 갔다.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충청도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자 입교하고 집안 식구와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홍지영이 헤어져 살기를 원해 그녀는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 홍순희(루치아)와 전처의 아들인 홍필주(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강완숙은 지황, 윤유일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고, 1794년 12월 23일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의 거처(최인길 마티아의 집)가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발각되자 1795년 6월부터 1801년 4월 체포될 때까지 6년간을 자신의 집에 주 신부를 숨겨주었다.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서 보례를 받고 여회장으로 임명된 그녀는 전교에 힘써 왕족과 궁녀, 양반집 부녀자들, 과부, 머슴, 하녀 등 반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여성들을 영세 입교 시켰다. 주신부 입국 당시 조선 천주교회 신자 수는 겨우 4000여명에 불과했으나 5년만에 1만여명이 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여신자가 절대 다수였음은 강완숙의 활동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황사영(알렉시오)는 강완숙에 대해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을 뿐 아니라 상식과 지식에 재치있는 말재주까지 겸비해 주 신부가 모든 대소사를 그녀에게 맡겼고, 그녀의 집은 첨례를 보는 장소로 가장 많이 이용될 정도로 조선 교회의 중심지였다"고 말했다.
강완숙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주문모 신부가 1801년 4월 24일 자수해 5월 30일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어서 그 동안 주 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했으나 이것을 전해 받은 여 교우의 부주의로 분실되고 말았다.
<평화신문, 633호(2001년 7월 1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신유박해 이전의 박해들
1801년 7월
지난 2월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척사윤음' 반포로 시작된 신유박해가 5개월간 지속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자 이들의 순교록과 박해사를 기록하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황사영(26, 알렉시오)를 비롯한 황심(45, 토마스), 옥천희(요한), 김귀동, 김한빈(37, 베드로) 등은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순교사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이번 신유박해 이전까지 일어난 천주교 박해들을 간추려 본다.
△ 명례방 사건(을사추조 적발사건)
1784년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되고 1년 후인 1785년 봄 명례방(서울 명동성당 일대)에 있는 역관 김범우(토마스)에서 이벽(세자 요한)의 주도로 신앙집회를 갖고 있던 신자들이 형조의 순라군에 적발돼 전원이 형조로 연행된 사건이다. 연행된 신자들 중 이승훈, 이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와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부자 등은 훈방 조치된 반면 김범우는 구속돼 혹형을 받고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됐다.
이 사건은 돌발적으로 터졌으나 그간 비밀리에 존재하던 조선 천주교회가 적발된 첫번째 박해사건으로, 신생 조선교회에는 큰 타격을 끼쳤다.
△ 신해박해(진산사건)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는 1791년 5월 전라도 진산의 명문 양반 출신인 윤지충(33,바오로)이 모친상을 당하자 '폐제매주'(제사를 거행치 않고 신주를 묻어 버린 일)로 물의를 일으키자, 윤지충과 그를 두둔하고 나섰던 권상연(41,야고보)이 전라감영으로 압송돼 순교하면서 촉발됐다.
이 사건으로 안정복, 홍낙안, 목만중과 같은 척사론자들이 대두했고, 정조 임금에게 천주교를 탄압하고 교회서적을 불사를 것을 지시했으며, 이로써 권일신, 이승훈,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이 체포됐다.
신해박해는 조선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순교자가 탄생한 박해였으며 교회내 양반 지도층의 붕괴와 함께 중인계급의 지도자들이 출현하고 천주교 신앙이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계기가 됐다.
△ 을묘박해(을묘실포사건)
주문모 신부를 놓친 '을묘실포사건'을 계기로 야기된 1795년 6월 27일 '을묘박해'는 최인길(31, 마티아), 윤유일(35, 바오로), 지황(사바)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1794년 12월 밀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행적을 배교자 한영익이 포청에 밀고함에 따라 발생한 사건으로 최인길이 주 신부로 변장해 자신이 체포됨으로써 주 신부를 피난시킬 수 있었다.
포청은 주 신부를 놓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최인길, 윤유일, 지황을 체포한 그날 밤 때려죽이고 시신을 강물에 버렸으나 2개월 뒤 대사헌 권유에게 발각돼 포장은 주 신부를 놓친 책임을 져야 했다.
이 사건으로 이가환(이승훈의 외숙, 신유박해때 옥사)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됐고,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됐으며,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평화신문, 633호(2001년 7월 1일), 리길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