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영원한 삶을 믿나아다! [길섶수녀 ]

2006. 12. 2. 오전 1:24:51

글자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가 모든 이의 궁극적인 관심사다.

 

   1981년 여름 나는 샌 프란치스코에서 공부를 하면서 고향생각도 달랠 겸 주말이면 그곳 한인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듬 해 본당 신부님이 교구사제 피정을 떠나시며, 신앙생활에 관한 이야기면 무엇이라도 해도 좋다고 하시며 한 주간 교리를 부탁하셨다. 사제관 이층 커다란 도서실에서 하루 종일 교리를 준비하였으나, 머리만 혼란스럽고 그대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어서 다 제쳐놓고 처음부터 다시 기도를 하였다. “주님,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와 주세요.” 하고 멍청히 앉아 있노라니 느닷없이 사도신경 해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칠판 가득히 사도신경을 써놓았다. 그리고 이민을 와서 십년 또는 이십년 개신교에 나가다가 교리를 배우러 교실 가득히 들어찬 100여명의 어른들 앞에서 “저는 10년간 장로교인이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가톨릭 신자가 된 후 20년간 믿고 살려고 해온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인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런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하여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 . . ” 에서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까지 두 시간의 교리를 숨차게 끝냈다.


   그런데 어느 처녀가 “수녀님, 사후세계가 정말 있을까요?”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을 듣는 순간, 1980년 11월 서강대학교 마리아홀에서 5일간 피정을 할 때의 체험이 떠올랐다. 그 짧은 순간, ‘주님, 그걸 어떻게 말해요?’ 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네 부끄러움을 팔아 복음을 전하지 않으련?’ 하시는 말씀이 마음 속 어디선가 들려 왔다. 용기를 내어 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예수회 린 형제 신부님의 성령은사쇄신 피정이었는데, 사흘 째 되는 날 마태오 신부님이 “오늘은 가족 중 죽은 이들과 화해하는 날로 잡았습니다. 죽은 이들의 이름을 쓰시고 미사 중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집엔 죽은 사람 중에 나와 화해가 필요한 사람이 없는데. . .’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런 나를 위해서인 듯,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주님께 그런 사람을 떠올려 달라고 청하십시오” 하는 신부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눈을 감고 “예수님, 제게 기도해야 할 사람을 떠올려 주세요.” 했을 때 즉시 20년전에 우리집에 업동이처럼 들어와서 석 달 가량 살다가 피부암으로 죽은 4살짜리 남동생이 예수님 튼튼한 팔에 안겨 울먹이는 얼굴로 나타났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에 샘이 나서, 꼬마를 괴롭힌 철부지 행동들이 함께 생각나서, “승현아, 미안해. 널 미워한 건 아니었단다. 누나가 철이 없어서 잘못했어.”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 동안 심령기도를 하고 있자니, 다시 승현이가 예수님께 안겨서 나타나 나를 보며 환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해에, 나는 20년전 맏아들인 승현이를 잃고 한달을 방황하셨던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에게 승현이 이야기를 소상히 써서 “천국에서 승현이가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믿어요” 로 끝맺은 성탄편지를 부쳤다.


   영혼은 불멸임을 나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큰 은총을 받았다. 또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무참히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믿고 바라며, 위타적 삶으로 일관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존재를 충만케 하는 참된 행복을 얻으라는 초대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내가 아는 어느 여의사는 “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이인 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바라시고, 행하신다고 믿어요”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오묘한 섭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녀의 말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곧 하느님 결정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만사가 선하게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로마 8,28)를 체득한 행복한 확신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살아간다.


   1993년 8월부터 나는 “영적 성장과 내적 치유” (제임스 휠러 지음: 성바오로 출판사, 1991) 라는 책을 가지고 순서대로 28단계의 이냐시오 영성수련을 시작했다. 그 중 제7단계, ‘영생에로의 길이신 예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치유’를 1994년 5월 중순부터 거의 두달에 걸쳐서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일어나 어떤 날은 이 순서를 도저히 따를 수가 없어서, 매일미사 복음을 택하기도 하였다. 이 기도가 끝난지 일주일, 불볕 복더위가 한창이던 7월17일은 어머니의 71세 생일이었다. 75년 이래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힘겹게 투병하시던 어머니는 주일 새벽 미사를 다녀 오신 다음, 동생과 나와 함께 외식을 하시고는 다리가 아프시다면서도 즐겁게 웃으며 헤어지신 지 4시간 만에, 갑자기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한달 전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 병자의 성사를 받으시고 열흘 만에 퇴원하신 뒤, 나는 가족 방문 휴가를 내어 어머니와 함께 일주일을 지내며, 혼자 있는 시간엔 앨범을 정리하느라 몇 시간이고 가위를 싹둑거렸다. 어머니의 떠남을 미리 준비시켜 주신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자애로우심은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여기에 휠러 신부님의 영원한 생명에의 관문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8단계를 간략하게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첫째 단계인 거부의 단계에서는 요한 복음 12장 23-28절을 기도한다. “. . . .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제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보존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 .”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희망이 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서 거부를 느끼시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심으로써 영원한 삶에 대한 동의를 시작하신다. 이 단계에서 나는 받아들여야 할 것을 거부하려는 마음을 느끼며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직면하기 시작한다.


   둘째 단계는 타협의 단계이다. 루가 복음 22장 39-46절의 말씀으로 기도하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리에 직면한다. 예수님 안에서도 회피와 타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죽음의 잔을 두려워하셨고, 아버지께 그 잔을 치워달라고 청하셨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단순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예수는 불안을 해결하신다. 나는 얼마나 많이 내가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고, 그들의 죽음을 직면하는 것을 피해왔는가? 나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셋째 단계는 분노이다.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삶을 떠나는 데 대한 분노를 겪는다. 루가 복음 23장 33-34절을 묵상하고 기도한다. “. . .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성부의 의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 그 분노를 이기셨다. 그분은 당신 자신의 분노만이 아니라 성부와 어머니 마리아, 요한, 또한 당신의 죽음으로 고통당할 모든 사람의 분노까지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이 모든 이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기도하셨다.


   넷째 단계는 우울이 지배적인 감정이 되며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마태오 복음 27장 45-47절을 일고 기도한다. “ . . . . 세시쯤에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것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말이다. . . .” 나는 예수님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슬퍼한 적이 있는가? 나보다 앞서 죽은 이들을 위해 슬퍼한 적이 있는가? 혹은 그 슬픔의 감정을 깊이 억누르고 있지는 않는가? 마태 5장 4절에 나오는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삶에서 피할 수 없이 맞게 되는 상실에 슬픔을 느낀다면, 라자로의 죽음을 겪으셨고, 지금은 아버지에게서까지 버림받는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께 위로를 청하자. 이 단계에서 나는 상실의 슬픔을 견디어내고, 그리스도 품안의 새로운 삶으로 영혼을 열어놓게 된다.


   다섯째 단계에서는 고통과 그 결과인 죽음을 받아들인다. 루가 23장 44-46절을 보자.  “. . . .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하셨다 . . . .”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동의하신다. 나의 죽음과,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의 시간, 장소, 상황을 받아들이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나는 갈바리오에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처럼 또한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받아들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의 문턱에 다다르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여섯째 단계는 잃어버림, 상실의 단계이다. 루가 복음 23장 50-56절에서는 주님을 따라 다니던 여자들도 따라가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서 향료와 향유를 마련하였다. 묻히신 예수, 그분은 삶과 모든 관계를 버리셨다. 우리들 모두는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미련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나를 비움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 복음 19장 25-27절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시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 가장 소중한 분들을 서로에게 주시며, 아버지께로 떠나심을 준비하셨다. 십자가 밑에 서계시던 성모 마리아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아버지께로 돌려드려야 함을 인정하는가? 요한 복음 7장 33-34 절에서 예수께서 “나는 이제 잠시 당신들과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갑니다. 당신들은 나를 찾겠지만, 나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 당신들은 올 수도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죽은 이들이 성부께 나아가기 위해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께 가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나의 소유욕과 애착을 끊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아버지께로 가는 죽음의 때를 받아들이며, 뒤에 남은 사람들을 성령께 맡겨드린다.


   일곱째 단계에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신다. 루가 복음 24장 1-8절에서는 번쩍이는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여자들에게 나타나 “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요한 복음 20장 1-10절 에서 “시몬 베드로와 요한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요한 14-16장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특징을 알아본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도록 간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들이는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내 삶의 순간 순간은 죽음으로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여덟째 단계에서는 성인들과의 통공이 (친교 또는 통교가) 깊어지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17장에서 아버지께 보고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신다. 히브리서 8장 8-11절에서 “나는 나의 법을 그들의 생각 안에 넣어 주고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넣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 . .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나를 알 것이다” 고 말씀하신다. 성인들과의 친교에서는 실제적인 믿음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석달 후인 10월에, 나는 미국 프란치스코 카푸친 수도회 아트 쿠니 신부의 전국 성령은사쇄신 피정에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찬 신자들에게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기억나는 대로 간추려 본다.


  “저는 니카라과 오지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온 국제 전화에서 동생이 오랫동안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혼자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자살한 것을 발견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화가 났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허용하실 수 있습니까?’ 온 가족과 나에게 이런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죽음을 경험하게 한 동생에게 화가 났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동생에게 좀 더 가까이 가서 무언가 도와 줄 수도 있지 없었단 말인가?  내가 동생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는가? 동생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좀 더 낼 수 있었는데 . . . .’  슬프고 괴로와서 아무에게도 위로와 평화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분만이 나의 고통을 알아 주시고,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죽은 내 동생을 받아주실 것을 알고,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우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용서해 드렸고, 동생에게도 그런 죽음을 죽은 것을 용서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예수님, 당신은 저를 아시고 제 마음을 다 아십니다. 제 동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동생이 당신 품 안에 있으니, 제가 동생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시고, 동생을 사랑한다고 전해 주시고, 저를 대신해서 동생을 꼭 안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위로를 받으며 다시 주님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산 신앙”: 성모 출판사, 1994).


  신부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역하면서, 나는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모니카를 잃은 상실감과, 딸만 둘 있는 집의 맏이로서 졸업한지 13 일 만에, 만20세에 수녀원에 첨벙 뛰어들어 “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고 하시며 3년간 면회도 못 오시며 가슴앓이를 하셨고, 평생토록 한을 안고서 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으셨던 어머니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한 불효와 철없음의 죄책감과 슬픔에서도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신부님의 분노와 고통, 슬픔과 기도는 그대로 나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신부님을 이 땅에, 이런 때, 나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쏟으시는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섭리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일년간 모든 성인을 부르며 연도를 바치는 동안, 이승과 저승이, 영원한 생명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처럼 그 경계가 얇아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를 기도하면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는 성인들과 천사들이 전보다 훨씬 더 가까이 느껴지는 동시에,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는 기도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났다. 묵주의 9일기도 영광의 신비 제2단을 바친 후 “나는 활짝 핀 장미 송이 송이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의 덕을 구하며 정성되이 어머니 발 앞에 바치나이다.” 고 외우노라면, 사람이 영원토록 살기 위해 태어났음을 믿고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나 또한 어머니를 따라 언젠가는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그 날까지, 시편저자와 함께,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듯 가버리나이다.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시편 90,10+12) 를 마음 다해 읊게 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때가 오면, 이승에서 사랑하고 섬겨 드리지 못한 어머니를 만나,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처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영원토록 주 안에 내가 거하리라, 영원토록 주 안에 나 안식하리라.” (시편 23). 왜냐하면 “과연 옥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거느려 기르시고 그들을 생명의 샘물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 (요한 묵시록 7,17)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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