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매일 복음 묵상

2007. 6. 13. 오후 7:29:40

글자

새벽을 열며

 

 저는 작년까지 강화도에 있는 갑곶성지에 있었습니다. 사실 갑곶성지가 얼마나 공기 좋은 곳인지를 살고 있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지금 도시 안에 살고 있다 보니, 성지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경관이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어제 일이 있어서 서울 신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정말로 사람도 많고, 도로에는 빵빵대는 차로 인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더군다나 공기는 얼마나 나쁜지요. 이러한 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간석4동이 정신없고 공기도 안 좋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촌에 비교할 때, 너무나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제서야 알게 된 것이지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장 큰 은총의 순간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즉, 지금 주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계신데,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이 좋은 것들이 가장 형편없는 것이라면서 불평불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힘들어하고 지쳐했던 것은 아닌가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쓰신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만큼 귀한 존재임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지요.

문제는 내가 그렇게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세상의 빛과 소금이야?’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의 한 순간만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아직 오직 미래를 계속해서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내 존재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그래서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로 창조된 우리들이기에,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은총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그 상황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내가 귀한 존재이기에 은총이 가득한 행복의 순간일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이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때, 바로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임을 잊지 맙시다. 나는 빛과 소금입니다.

 빠다킹신부

 


 

   세상의 빛      

-박영봉 신부-


 세례 때 입는 흰옷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상징합니다. 부활초에서 불을 붙인 촛불은
그리스도께서 새 교우를 비추셨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드러납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그분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성화시켜주고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를 알고자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듣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성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하시고,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요한 16,13) 이끄시는
‘성령’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어느 신부님의 금경축 기념 미사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제가 보좌신부로 있을 때 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모셨던 분이 얼마 전에 금경축을 맞으셨습니다. 신부님의 금경축 기념 미사를 몇몇 신부님과 함께 봉헌하였습니다. 금경축을 맞은 신부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셨습니다. 미사 시작 예식에서 성호경을 힘없고 지친 목소리로 하실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늙고 병듦에 대한 힘겨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축하식에서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셨는데,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인사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의 50년 사제 생활을 담은 슬라이드는 그분 생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과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영상을 통해 드러난 노(老)사제의 삶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유익했는지를, 그분의 존재가 얼마나 많이 하느님을 드러냈는지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흠숭하는 사제직을 보편적으로 수행하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이 그리고 이웃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과 이웃에게 빛이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잘한다와 자알한다의 차이?

-강호성 신부 -


 . 제가 예비자 교리를 할 때 꼭 빠지지 않고 하는 말들 중에 ‘잘한다’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잘한다라고 하는 표현을 할 때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어감의 차이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우리말의 좋은 점 중 한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잘한다’(야아, 참 잘한다)라는 어감이 있고, 두 번째는 ‘자~알 한다’(어이구, 자알한다)라는 어감이 있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말들입니다. 잘한다라는 것은 정말 잘하기에 야아 참 잘하네라고 하는 것이고 자알한다라는 것은 어이구, 잘하기는 개뿔이라는 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믿는 놈이 더하다’라는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정말 열심히 잘 살아서 잘한다고 하는 것인지, 순 엉터리로 살아서 자알한다고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스승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케하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선택을 받고, 불림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착하게 살아서 세상 사람들이 그런 우리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소금이 짠맛을 잃거나, 어둠을 이기지 못하는 빛은 어디에도 쓸데가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변질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비록 하느님께 선택받은 우리일지라도 선택받은 사람답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지도자라도 어리석으면 소용이 없고, 당신 제자라도 그 따르는 방법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어떻게?' '하여튼 성당 다니는 것들이 더해'
'성직자들, 수도자들, 지도자들, 봉사자들, 그들의 태도 때문에 교회가 싫어졌다'
라는 말들을 가끔씩 듣습니다. 마음 아픈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거나 마음이 떠나면, 그 상처들이 아물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즉 빛과 소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실망을 느낀 것이 아닐런지요?


  우리가 하느님께 불림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사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기 때문(갈라디아 2,20)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㰡내 삶 내가 사는데 무슨 참견이냐?㰡‘라고 하거나㰡내 방식대로, 내 멋대로 산다㰡‘라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바라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을 통해, 매일의 일을 통해, 하루 일과 전체를 통해 복음을 실천하고 증거 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잘한다, 참 잘한다’라고 말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 재미난 얼굴, 맑고 밝은 얼굴로 살아가나 라고 말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저런 고통 속에서도 활짝 핀 얼굴로 살아가나 라고 말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궁금해 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하고, 결국은 하느님 품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세상의 빛이다

-김웅태 신부  -


오늘 복음에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이 "선" 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단순히 성질이 선한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또 하나는 단순히 선할 뿐 아니라 매력 있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의 착한 행위를 단순히 선할 뿐 아니라, 마음을 끄는 힘이 있는 착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 누가 어떤 때 착한 행위를 하지만, 무엇인가 굳어지고, 차고, 엄해서 다른 이가 근접하기 어려운 것을 우리는 경험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위는 사람들의 주의를 자기 자신에게 끄는 행위여서는 안되고,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에게로 돌릴 줄 아는 착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몇몇 젊은이들이 진지한 신앙심을 가지고 철야 기도를 가진 다음에 자기 선생님을 아침에 만났을 때 "선생님 저희 얼굴이 믿음으로 빛나지요?!" 할 때 그 선생님은 "모세는 자기 얼굴이 빛나는 것을 자기 자신은 알지 못했습니다!" 했답니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 빛이다" 하시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비치는 빛은 그 자체가 빛이 아니라 하느님을 반사하는 빛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을 남 앞에 빛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이 밝은 것은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빛은 사람에게 보여집니다. 이스라엘의 마을은 산 위에 있어서 밤에 멀리서 보면 마을이 빛이 났습니다. 팔레스티나의 가옥은 지름이 50센티미터 정도의 창문 하나로 어두었습니다. 성냥이 있기 이전이므로 한번 끄면 켜기가 어려웠습니다. 등잔을 평소에 나무로 된 등잔대에 얹어 둡니다. 그러나 외출 시에는 흙으로 만든 말 위에 얹어 불날 위험을 없앱니다. 등잔불의 본 기능은 사람들을 비추는데 있습니다. 크리스찬은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착한 행실! 선한 행위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아는 빛을 드러내서, 다른 이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독서산책-1> : 예수 안에 하느님의 모든 것이 있다!

6월의 더위와 함께 눈앞에 펼쳐지는 파랗고 높아지는 하늘,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공기 흐름, 포도, 사과, 벼, 등을 보니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마음 가득 들어옵니다.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좋은 기대감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 달에도 하느님께서 더 좋은 일을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독서인 코린토2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있던 교회에 두 번째로 보낸 서신입니다. 이 내용에서 보면, 사도바오로는 코린토교회에게 곧 가겠다는 소식을 주고 준비하라고 알려 놓았습니다. 코린토교인들은 사도 바오로가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뜻하지 않은 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교인들이 기다리다가 지쳤고, 교인간에 불난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도 바오로를 이해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이는 "아니다. 그는 못 믿을 사람이다. 처음부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라고 수군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쟁을 일으키는 못된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오로는 "내가 이렇게 계획하면서 변덕이라도 부렸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계획하는 것이 속된 동기로 하는 것이어서, 내가 “예, 예!” 하면서 “아니요, 아니요!” 한다는 말입니까?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17-18)라고 강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내용이 오늘 독서 말씀의 골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에 가지 못한 이유를 "내가 이렇게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사사롭게 경솔한 마음으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느님께 최선으로 순종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코린토 교인들에게 세상적으로는 긍정적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신앙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 합니다"(19-20)

1. 그리스도교는 아멘의 신앙입니다.

아멘은 히브리어 동사 '아만'에서 왔으며 헬라어도 아멘, 영어도 아멘, 우리말에도 아멘이 있습니다. 낯선 나라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찬송과 말씀을 이해 못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한마디, 아멘이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기도하면서 아멘, 찬송 부르며 아멘, 성경 읽으며 아멘, 강론을 들으며 아멘을 합니다. 아멘은 나라와 시대를 초월한 언어, 남녀노소를 불문한 언어, 만국 공통의 언어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멘이요, 가장 귀한 말이 아멘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은 26번 이상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라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아멘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예수님은 이 말을 자주 사용하셨고, 힘주어 말씀하시며 사용하셨습니다.

2. 그러면 '아멘'에는 어떤 뜻이 들어 있습니까?

첫째로, 아멘은 '동의'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동감하고 동의할 때 쓰는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예! 맞습니다. 예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을 품고 있을 때 함축해서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주님의 확고한 말씀,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 제자들이 보는 것 같이 당신께서 다시 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모든 성도와 온 교회가 온 우주가 믿음으로 화답합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여러분은 이렇게 믿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까?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십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동감 동의의 언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러시아의 한 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거대한 그림 앞에서 저는 '아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아들과 같이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위로의 품에 안기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가 지쳐 돌아온 아들을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것처럼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를 주님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기뻐하십니다. 아멘은 여러분의 믿음 생활을 반석과 체험 위에 올려놓는 축복의 언어입니다.

두 번째로 아멘은 맹세하고 헌신하고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는 재판관 앞에서 맹세하고 다짐케 할 때, "너희는 아멘 아멘 할지어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요한묵시록에는 예수님을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묵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향하는 최고의 헌신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헌신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한번도 '아니요'라고 한적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순종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순종이었고. 고난의 길을 걷는 것도 순종이었습니다. 게쎄마네 동산에서 "하늘의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앞에서 아멘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신 것 다 없어진 다음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건강할 때, 재물 있을 때, 주님 기회 주셨을 때 '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멘, 예' 할 때 하지 못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의 아멘은 하느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 수확 때의 시원한 얼음과 같아 그 주인의 생기를 돋우어 준다"(잠언 25,13) 이처럼 아멘은 믿음직스러운 언어입니다. "우리도 아멘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처럼 아멘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아멘은 하느님의 뜻이 부족한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능력의 언어입니다. 아멘의 말속에 축복과 은총과 능력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아멘은 진실되고 긍정적인 삶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데이빗 브링클리는 말하기를 "성공하는 사람은 남들이 자신에게 던지는 벽돌을 가지고 오히려 튼튼한 기초를 쌓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나와 유명한 심리학자가 된 빅톨 프랭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건 우리 자신이 우리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타고난 재능, 높은 IQ, 많은 학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태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멘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노멘이겠죠? "이것좀 합시다"라고 말했는데, '노멘!' 이렇게 말하면, 하느님도 멀리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돈 한푼 없이도, 돈 한푼 안들이고도 얼마든지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아멘하기, 반갑게 인사하기, 칭찬하기"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기도 소리가 끊어지면 생명력을 잃고 죽어 가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찬송 소리가 끊어지면 기쁨을 잃고 시들어 가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아멘 소리가 작아지면 헌신과 은혜와 믿음이 작아지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긍정적인 신앙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 어느 한 구석에서도 비관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멘'은 믿음 있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진실된 사람, 긍정적인 믿음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내일을 보고 이겨 나가는 백성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아멘의 백성입니다. 우리 교회 어디를 가든지 아멘 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여러분은 믿음과 헌신과 긍정의 말 아멘의 삶을 사시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김경욱신부-


 

어제 우리는 진복선언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대목에서부터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어떤 환란이나 역경속에서도 좌절 하지 말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진정한 행복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먼저 소금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우리는 소금을 어디에 사용합니까? 소금은 짭니다. 그리고 썩지 않게 도와줍니다. 최고의 방부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먼지나지 않게 먼지를 결집시켜 줍니다. 그래서 운동장에 뿌립니다. 바로 소금은 신앙인이 세상에 살면서 해야하는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진하면서 짜게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자신을 녹일 때, 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소금의 희생으로 썩지 않을 것입니다. 소금이 먼지를 자신의 몸에 뭍혀서 먼지나지 않게 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청소부가 되어야 합니다. 버럽고 죄에 물든 세상에 소금이 되어 우리의 희생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제 등불의 비유를 봅시다. 신앙인은 소금의 역할 과 더불어 빛의 역할을 합니다. 밤이 오면 세상은 캄캄해 집니다. 죄에 물든 세상을 밤이라고 할 때,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려면 반드시 등불이 필요합니다. 그 등불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한 역할을 합니다. 세상사람들의 안내자, 인도자는 바로 신앙인입니다. 신앙인들이 이 혼탁한 세상에 내재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또한 바로 빛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빛은 사람들을 비출 수 있는 곳에 올려둡니다. 감추고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잘 감춥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신앙을 들킴으로써 받게 되는 불이익보다도 옳게 살고 있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이는 수년을 같이 직장생활을 했었는데, 우연히 이웃 성당에서 혼배미사 때, 만나서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을 아직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를 본받아 우리 신앙을 떳떳하게 증거하고 증거한 신앙을 조차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입니다.

등경위에 얹혀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내 신앙을 통해서 신앙인의 자리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널리 베푸는 사상이 빛의 신비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요즘 세상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리적으로도 너무 혼탁하고, 경제적으로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같이 더불어 살기가 너무 힘든 세상입니다. 이런때, 빛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을 바르게 사는 모범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 보다도 여러사람들이 바로 빛을 보고 찾고 신앙인의 삶의 모법을 바라보며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중개 역할 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짠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 소금은 버려질 것입니다. 세상의 등불이 꺼져 있다면 세상이 캄캄한 것은 물로 우리는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하며 소금과 빛의 역할을 바로 신앙인인 우리들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시고,

-김효성 수녀 (성심수녀회, 통합사목연구소)-


 

내가 사는 원효로에는 네 개의 작은 공동체가 있다. 재잘거리는 성심 중고생들의 교정에 봄이 오면 젊음이, 그 생명력이 더욱 싱그럽게 피어오른다. 싱싱하게 자라나는 젊은이들을 돌보며 그 안에서 일할 때는 하루 종일 어찌나 할 일이 많고 바빴던지. 어떤 때는 1주일 내내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교문 밖을 나가 보지 못하는 때가 허다했다. 그러니 교정 안에 일하는 모두가 자연히 서로 북적거리며 가까이 살 수밖에 없다.

성심회 수녀들이 모두 다 젊은 학생들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학교처럼 바쁜 일과에 서로 끈끈히 묶여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공동체 숫자도 보통 가정처럼 6,7명 정도가 함께 사니, 얼마나 서로가 투명하게 드러나는지 모른다. 기본으로 밥 짓고 설거지하는 일은 물론, 주말이면 장을 보고 집안 청소나 빨래, 허드렛일 등을 함께 나누어 해야만 간신히 1주일을 먹고 살아가는 질서가 잡힌다. 어디 그뿐이랴. 손님 초대, 오가는 방문객(그것도 국내외로) 맞기, 공동체 각종 회의 등. 수녀원에서는 기도만 하는 줄 알았는데 수녀원 입회 후 그 생각이 싹 가셨다. 수련장 수녀님은 성심회에서는 바쁜 하루 일과도 가난한 삶의 표현이라고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시고,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 집안을 다 밝게 비춘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고 말씀하신다. 성심회가 국제 수녀회인 덕에 나는 수녀원 일로 몇 차례 세상 밖에 나가 본 적이 있는데, 그러면 막연히 답답하던 서울 생활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또 무엇인가 더 큰 세상에 있다는 느낌도 생기고, 나의 관심이나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주님께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 하시는 말씀을 어쩌면 그런 식의 큰 세상을 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작은 집안 구석에서, 답답한 살림살이에서는 빛도 소금도 되는 것이 왠지 시시해서 싫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며 내 인격이 품은 소금의 농도와 빛의 밝기가 얼마나 작은지 알게 되면서부터,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세상에서 나의 빛과 나의 소금이 더 쉽게 쓰이는 사실에 오히려 다행스럽다. 하루 종일 부대끼며 사는 우리 공동체, 서로 너무나도 투명하게 읽혀지는 우리 공동체에서는 이제 한 사람이라도 없는 날이면 그 빈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한 사람의 소금의 맛, 빛의 밝음이 너무 크게 다가오기에. 경험으로 보니 주님은 우리 각자가 당신에게서 소금의 맛과 빛의 밝음을 계속 조금씩 얻어내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우리 각자가 작은 세상을 비추어도 주님은 당신의 큰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시고도 남는 분임을 믿는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신실하게

-이봉하수사-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에 하나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부모 욕은 먹이지 말아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일상 안에서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하고 사람들로부터 신실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뿐 아니라,
나를 낳아 기른 부모님에게도 칭찬이 돌아가겠지만,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산다면 나뿐 아니라, 부모님까지 욕을 먹게 된다는 것. 어찌 보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이 한 말씀은 복음의 한 구절처럼
제 가슴에 살아 움직였던 것 같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씀 중 하나가 ‘깨어 있어라,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완벽한 신앙생활을 요구한다기보다
일상 안에서 살아 숨쉬는 소금과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소금과 빛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안에서도 한결같아야 함을 말합니다.
초대 받은 사람이 초대한 사람의 명예를 더럽히면 안 되듯이 우리 또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신실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양승국신부-


<어찌 그리 좋아죽겠다는 얼굴인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 분들로부터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더해요.”


“성직자들, 수도자들, 지도자들, 봉사자들, 그들의 태도에 교회가 싫어졌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붙잡고 제 나름대로 설명해 드려봅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부족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이니 부족한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 신자, 지도자, 너 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결국 우리 교회는 그 속성상, 본질상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부족하기에, 죄인이기에, 상처가 많기에 하느님 자비가 풍성히 내리는 곳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죄인들이 주님과 함께 정화의 여정을 걷는 곳이 우리 본당입니다. 힘내십시오.”


열심히 설명해보지만 별로 소득이 없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은 이미 굳게 닫혀져 열릴 줄을 모릅니다.


교회를 떠나가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구성원 모두는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제대로 된 성직자상, 수도자상, 지도자상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실망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라’는 식의 고자세였기에, 우리가 지나치게 폐쇄된 ‘끼리끼리’ 문화에 익숙해있기에, 우리가 은연중에 지나친 권위주의, 도에 넘치는 형식주의에 물들어있기에 그들이 떠나간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내 삶 내가 사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말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세례 받은 이상 ‘나는 남 눈치 안보고 내 방식대로 산다’고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제 공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의 발밑을 찬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내려다보고 계심을 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찬란한 하나의 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홀로 밤길 걷은 나그네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환한 하나의 등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이 보든 말든, 험한 저잣거리에서든 차가운 밤길에서든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매일의 삶을 통해, 매일의 일을 통해, 하루 일과 전체를 통해 복음을 실천하고 증거 하는 세상의 빛이 되십시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 재미난 얼굴로 살아가나? 저들은 어떻게 저런 고통 속에서도 활짝 핀 얼굴로 살아가나? 저들은 왜 허구한 날 저렇게 손해만 보고 살아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죽겠다는 표정인가? 의아심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그들이 발걸음이 저절로 교회로 향하길 바랍니다.

 

 


 
†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 †
-박상대 신부-


예수님의 산상설교(5-7장)가 이어진다. 산상설교의 주된 가르침의 내용은 두 가지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율법의 참된 정신에 관한 것이다.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에 필요한 새로운 헌법(憲法)을 선포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율법(구약)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였던 것처럼(출애 19-24장) 예수께서도 산 위에서 하느님의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시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제고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헌법(신약)으로 삼으려 하신다. 산(山)은 하느님 현존의 표현이며, 산 위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적 가르침이다.

산상설교의 첫 계단으로 진복(眞福)이 선언되었다.(5,1-12) 오늘은 소금과 빛에 대한 가르침이 내려진다. 소금과 빛의 본질과 역할에 대하여 달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한 제자들의 본질(本質)과 사명(使命)을 소금과 빛의 상징으로 조명하고자 하신다.

소금은 본성상 음식의 맛을 돋구고 부패를 막으며, 빛은 어둠을 밝히고 사물을 식별하게 해준다. 제자들의 사명이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셈이다. 결국 소금은 제자들의 내적(內的) 자질(資質)을, 빛은 제자들의 외적(外的) 활동을 의미한다. 내적 자질과 외적 활동은 사실상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행위(行爲)는 본성(本性)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는 명제에 의견을 같이 했다.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독일철학자들도 하나같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Was man nicht hat, das kann man nicht geben!)는 생각에 일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내면(內面)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후자(後者)를 굳이 유물론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참된 "제자 됨"의 내적 본질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외적 활동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며, 제자들이 본성에 따라 수행하는 외적 활동의 결과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하느님의 선(善)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 됨의 본성이다.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소금과 빛의 긍정적 역할보다 부정적 역할을 더 강조하신다. 소금과 빛의 부정적 역할이란 곧 역할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등불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금과 빛의 의미와 역할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제자들의 본질과 사명이 역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분명 제자들과 교회에 대한 경고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많다. 그 많은 것들 중에 성서는 "사람이 사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쇠와 소금이며, 밀가루와 우유와 꿀, 그리고 포도즙과 기름과 의복이다"(집회 39,26)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 중에서 유독 소금을 택하여 제자들의 본질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또한 제자도 교회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꿀이나 기름, 또는 설탕이나 버터가 되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교회가 세상을 위한 맛과 부패방지의 상징인 소금이, 그리고 밝음을 주는 빛이 되어 살아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교회가 설탕이나 버터가 된다면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자기가 받을 것이나, 소금과 빛이 된다면 세상의 찬양과 감사는 하느님께서 받을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소금과 빛의 삶

산상수훈으로 진복팔단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들 생활의 실천 철학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사명을 소금과 빛의 비유를 가지시고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으며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금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는 그 색깔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 모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존재나 그 형체야 어떠하든 그 맛이 짜다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9,50).

I.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1. 세상에 짠맛이 필요한 이유

지금 세상은 죄악으로 날로 부패해져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부패의 농도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은 이같은 세상에 용해되어 들어감으로써 썩음을 방지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데 그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다 소금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사람만이 소금의 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누가 만듭니까? 빛이 만듭니다. 바닷물을 일정한 공간에 모아 놓으면 햇빛이 내려 쬐어서 소금을 만듭니다. 그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소금을 만드십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의 썩음을 방지하는 소금을 만드실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의 그런 소금의 맛을 주시므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금의 새 생명이 우리로 짠맛을 내는 능력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썩음을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소금의 특징

소금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소금의 특징이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과 각 물질을 잘 조화, 합성, 숙성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소금은 그의 독특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소금은 자신이 스스로 썩는 경우가 없습니다. 만약 소금이 썩는다면 그 소금은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금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속에 물들어 자신을 썩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썩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성히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생명의 공급은 성령을 통해서 주시기 때문에 '너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소금은 맛을 냅니다. 만약 소금이 맛을 내지 아니하면 소금으로서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짠맛을 내려면 먼저 내 마음에 정결과 평화를 가져야합니다.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늘나라 백성의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맛을 낼 수 없는 소금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소금의 맛을 전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은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 그 맛을 심어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없는 그들의 부패한 인생 속에 예수의 맛을 심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 생명에 대하여 소금의 짠맛을 주어 살려내지 못한다면 이미 소금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3) 소금은 썩음을 방지합니다. 소금이 썩음을 방지하지 못한다면 그 소금은 이미 맛 잃은 소금이 된 것입니다. 세상엔 죄악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죄악인지 아닌지도 모르는지 제 마음대로 합니다. 막가파들입니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못 본체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의 집단 속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은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불안을 양상시키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곳에 소금을 쳐서 썩음을 방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이 죄악의 썩음에 대하여 소금의 구실을 못한다면 이미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린 우리에게 '그런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4) 소금은 자신을 희생(없애면서) 다른 물질간의 합성과 숙성을 촉진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의 짠맛은 소금 자신의 희생에서 나옵니다. 소금이 스스로 녹아서 자신의 생명을 다른 곳에 쏟지 않으면 짠맛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짠맛을 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까?
필립보서 2,2-8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엄청나고 놀라운 자기 희생을 치루신 결과 모든 죄인들이 죄를 지우고 그리스도의 선(올바름)를 주시며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주실 수 있는 소금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자신을 희생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소금이 녹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랑을 말합니다. 겸손을 말합니다. 도움을 말합니다. 위로를 말합니다. 경건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로 그리스도의 냄새를 주변에 풍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냄새는 죄로 부패해가는 이 세상에 능히 세상의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소금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우리는 소금으로 세상에 짠맛을 내야 하지만, 그 소금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요한 17,16)...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신분이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시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앞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명, 즉 소금과 빛 가운데 소금으로 비유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소금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공급해 주므로 죄악으로 썩어 가는 우리 주변에서 그 썩음을 막는 생명의 새 힘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생명의 새 힘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소금으로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았으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 소금의 구실을 할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두번째 주제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 그러면 빛이란 무엇입니까? 어둔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생명의 힘입니다. 이 빛 역시 소금처럼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느님이 바로 그 빛이신 것입니다.

II.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16)

1. 빛의 근원

우리는 빛의 근원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고 하셨습니다(1요한 1,5). 이 말씀은 그 빛 자체가 하느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빛은 하느님의 공유적 속성(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성품)을 나태내는 말입니다. 빛은 하느님이 소유하시고 계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빛의 소유자는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리고 이 빛을 비췰 수 있는 분도 그 빛의 소유자 되시는 하느님뿐이십니다.

창세기 1,3-4ㄱ절에는 빛의 창조 역사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의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던 상태에서, 하느님은 빛이 생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빛은 유형의 빛을 의마하지 않습니다. 이 빛은 세상에서 깨닫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하느님의 빛이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고리토2서 4,6절에서 밝혀 줍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 성업에서 먼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의 빛을 세상에 비취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으셨던 이 빛 아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두움에서 하느님의 창조 역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빛이 있으라 하신 이 하느님의 말씀을 빛을 만드신 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 소유하신 그 빛을 세상에 들어내 비취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세상에 비취신 일을 창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인간의 죄악으로 어두어져 세상이 저주받게 되었고 어두움에 빠진 세상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라고 하신 말씀대로 죄로 어두어진 세상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여 그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같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2. 빛의 역할

빛이 하는 일이란 자신의 빛으로 주변의 어두움을 물리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란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게 비취게 하는 일입니다.

(1) 빛은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어떤 빛이든 빛이란 존재는 어둠에 지는 법이 없습니다. 내 어두운 마음속에 빛이 들어오면 죄악의 어두움은 물러가고 새로운 빛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인하여 소망이 생기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고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빛은 길을 비취어 줍니다. 이 빛을 받은 사람만이 길을 찾게 되고 진리를 찾게 되고 생명을 찾게 됩니다. 세상 종교에는 이 빛이 없습니다. 그곳엔 빛되신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빛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인생의 참 빛이 되십니다.

(3) 빛은 사방팔방을 모두 밝혀 줍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빛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밝게 비취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가든 어둠을 물리쳐 주위에 빛을 발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빛은 언제나 따듯합니다. 빛의 근원은 불입니다. 불은 우리에게 따듯함을 줍니다. 이것은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빛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빛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로 빛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 5,8)라고 했습니다.

빛에 대한 묵상 종합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취려면 등과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등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기름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에 착한 행실로 나타나 이 일로 인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소금이요, 빛이신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계절은 찬란한 6월. 녹음방초 우거지는 6월로 들어갔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고속도로는 주차장같이 되었답니다. 매년 여름이면 듣는 뉴스이기에, 아ㅡ 여름이 드디어 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수성심 성월의 초엽에 주님의 성심미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삶과 인생도 의미가 있음을 다시 한번 진하게 확인해 보는 시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라고 하심을 묵상했습니다. 혼자 사는 우리 선교사들은 매끼를 스스로 준비하는 기쁨?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음식을 하면서 식당에서 봉사하는 분들의 어려움과 노고를 적지 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해 놓고 맛이 없을 때에는 정말 난감하다고 합니다. 혼자 먹을 때에는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본인이 만들었으니 무조건 맛있지요. 그러나 간혹 싱거운 음식을 먹을 때에는 참 맛없게 먹게 됩니다. 만약 소금으로 간을 못 맞추거나 소금이 없어 간을 못했을 때에는 그 음식을 먹기가 아주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행여 손님이 한분이라도 있으면 그날따라 왜 이리 음식이 맛이 않 나는지? 알 수 없는 조화입니다.(혼자 있을 때는 맛있는데...)

주님께서는 엄마 마리아를 도와 주방에서 음식도 자주 만드셨나 봅니다. 음식과 소금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부분에서는 음식에도 조예가 깊지 않으셨나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우리 신앙인이 세상 속에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그만큼 우리 신앙인들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좋은 모범으로 기쁘게 살 때만이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기쁨을 사는 것, 나로 인해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 말없는 선행으로 모든 이에게 평화를 주는 것,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몫이라고 주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 다같이 내가 속한 모임과 공동체에서 모두에게 기쁨이 되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기쁨조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우리가 속한 곳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몫이고 이것은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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