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령은 우리의 힘, 우리의 희망 †
주님은 떠나시는 고별의 장면에서 아직 하실 말씀이 많이 남아 있나 봅니다. 아마 제자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토마스와 필립보의 질문 이후에 거의 말이 없고 그냥 듣고만 있을 뿐입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순명하여 희망을 가지는 경우와 절망하여 포기하는 경우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웬만하면 제자 중의 어느 누구 한명이 나사서 '주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이 알아서 잘 할거니까, 편안히 가십시오'...라고 할만도 한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에는 정적이 깊이 감돌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모였던 군중들도 깊은 밤이기에 자고 있습니다. 티베리아 벌판에서 빵을 나누어 먹던 5000여명의 사람들도 지금은 깊은 밤이기에 자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주님의 복음을 듣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주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병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주님의 뒷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죄인들.....모두가 깊은 밤에 자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주님의 11제자만이 적막한 다락방에서 이별의 대화만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전에 등불을 켜 놓고 주님을 위해 함께하는 사람은 11제자들 뿐입니다. 12제자 중 1명은 어둠 속으로 나가서 어둠의 세력들과 작당을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등불이 끼진 상태에서 주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자고 있다는 의미). 주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중에 제자들에게 '까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과의 관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에 대한 관계성은 현재로서는 제자들 11명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 제자들에 의해 전 세계와 온 백성에게 전파되겠지만 현재로서는 11제자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빵을 얻어 먹고, 물을 얻어 먹고, 병을 치유받고, 죄를 사함받은 공생활 기간 중의 모든 사람들도 이제는 성령의 역사에서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즉, 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란 지금 가톨릭 성사제도로 보면 '견진성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세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를 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지만, 주님은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장차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자들이 대신 임무를 받아 전세계로 나아가는 복음화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성 수준에 머물러서 '떠남과 이별과 슬픔과 걱정과 불안과 장차의 문제' 수준 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한차원 더 높은 영적 제자로 육성시키기 위해 마지막 교육을 학습시키는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많은 자식들을 놓아두고 돈벌이를 위해 먼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큰아들 몇명만 불러놓고,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잘 돌보아라. (그리고 훌쩍이는 큰아들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아버지 역할을 할애하니 좀 어른스러워져야지....(그러니) 내가 떠나면서 이런저런 것을 준비해 놓을터니, 그걸 가지고 이런저런식으로 잘 도움(협조)을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고 키우거라....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그 (어린저런)이라는 것이 바로 성령에 대한 주님의 계속적인 말씀입니다. 지난복음과 연결하여 다시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은 사랑과 실천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이 결속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평화에 대한 약속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이와같이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현존은 공동체에게 평화를 주며 사랑에 의해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로 결속을 줄 것입니다.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공동체가 이 평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투쟁하도록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 사명을 생각하며 내 마음을 다져주는 글 하나를 묵상합니다. 박성철님의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中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패배와 절망의 연결고리, 실패와 실망의 연결고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늘 겪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것입니다
패배와 실패를 겪고 난 후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허나 그것들이 비록 기뻐해야 할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그것들에 때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다시피 비오지 않은 후에는 찬란한 무지개가 뜨지 않고
잎의 헌신 없이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 밖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이 약간 미끄러울 뿐이지 낭떠리지는 아니야...'하고.....
일어서십시오
당신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절망의 낭떠러지는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절망은 우리에게 만사가 곤란하다고 가르치니까요
[박성철님의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中에서]
그렇습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떠나시는 고별의 장이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자에게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질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희망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란 누구입니까? 네, 주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기에 아버지도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성령'이란 그리스도의 영, 어버지의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성령)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또 그분(성령)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A)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B)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C)께서 내게(B)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이 복음이 바로 삼위일체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즉, 아버지=나=성령의 관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주님(B)은 아버지(A)가 시킨대로만 했습니다(B=A). 그리고 성령(C)은 주님(B)에게서 들은 것만을 일러줍니다(B=C). 따라서 연역법으로 해석하면 성령(C)은 아버지(A)께서 시킨 일만 하게 됩니다. 고로 A=B=C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논증입니다.
다시 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한(A=B=C)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으며, 그리고 그 성령께서 하실 역할을 말씀주시고 계십니다“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 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 실 것이다”(14, 26)...주님은 이렇게 성령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즉 성령은 가르치는 것과 되새기게 해주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협조자, 곧 성령은 예수님의 계시에 어떤 새로운 계시를 덧붙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다빈치 코드'라는 책부터 시작하여 뉴에이지의 일부 그룹들이 자기계시를 마치 진리의 계시인양 헛소문을 내고 우리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통일교니 해방신학이니, 말기 재림예수니, 등등....많은 사이비들이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마치 계시인양 떠들고 있습니다. 이런 미혹한 시대를 예상하신 주님은 복음에서 분명히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다, 아멘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오로지 주님의 계시를 현존케하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 줄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은 공동체 안에서 교사로서 활동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 자신이 모든 신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타종교인들에게 비해 참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우리 가톨릭인들은 여호와 증인의 밥이라고 누가 그럽니다. 또 개신교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스파링 상대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런 말들이 소문으로 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점집에도 잘가고, 미신에도 양다리를 걸쳐놓고,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가르침(유혹)을 더 따르려고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 보다는, 우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활 제6주간을 보내면서도,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며, 어떤 사람은 십자가(고통) 없는 부활을 바라거나, 고통 없는 사랑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들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양다리를 걸쳐놓은 부족한 신심은 회개치 않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하느님 탓을 하고 애매한 사제들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누구누구는 영성이 부족하다느니...성령이 덜 임했다느니...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빵을 쪼개듯이 조금조금씩 나누어 들어오늘 줄 아는가 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인간적으로 습관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올인(All in)입니다. 쬐끔식 감질나게 하지 않습니다. 샘플로 조금 주었다고 시험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덜 가고...그렇질 않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양의 똑같은 질을 올인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이와같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즉 주님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주님께서 언제든지 오시도록 등잔을 켜 놓고 있는 자..., 그런 사람에게 올인하며 오십니다. 그 성령은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않는 자는 그분(성령)을 모릅니다. 그런데 준비되어 있어 성령을 받은 자는 그분을 확실히 압니다. 우리 주변에 성령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다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성령이 받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예비해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안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교회의 뜻에 순명하는 삶, 성사 안에서 살아가는 삶, 기도하는 삶, 성서를 가깝게 접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비를 일깨워 주실 것이며, 그 신비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행복을 덤으로 선물하실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할은 능동적인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이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우리의 시선을 돌려봅시다....◆
[두올묵상팀]
주님은 떠나시는 고별의 장면에서 아직 하실 말씀이 많이 남아 있나 봅니다. 아마 제자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토마스와 필립보의 질문 이후에 거의 말이 없고 그냥 듣고만 있을 뿐입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순명하여 희망을 가지는 경우와 절망하여 포기하는 경우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웬만하면 제자 중의 어느 누구 한명이 나사서 '주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이 알아서 잘 할거니까, 편안히 가십시오'...라고 할만도 한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에는 정적이 깊이 감돌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모였던 군중들도 깊은 밤이기에 자고 있습니다. 티베리아 벌판에서 빵을 나누어 먹던 5000여명의 사람들도 지금은 깊은 밤이기에 자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주님의 복음을 듣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주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병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주님의 뒷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죄인들.....모두가 깊은 밤에 자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주님의 11제자만이 적막한 다락방에서 이별의 대화만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전에 등불을 켜 놓고 주님을 위해 함께하는 사람은 11제자들 뿐입니다. 12제자 중 1명은 어둠 속으로 나가서 어둠의 세력들과 작당을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등불이 끼진 상태에서 주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자고 있다는 의미). 주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중에 제자들에게 '까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과의 관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에 대한 관계성은 현재로서는 제자들 11명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 제자들에 의해 전 세계와 온 백성에게 전파되겠지만 현재로서는 11제자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빵을 얻어 먹고, 물을 얻어 먹고, 병을 치유받고, 죄를 사함받은 공생활 기간 중의 모든 사람들도 이제는 성령의 역사에서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즉, 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란 지금 가톨릭 성사제도로 보면 '견진성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세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를 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지만, 주님은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장차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자들이 대신 임무를 받아 전세계로 나아가는 복음화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성 수준에 머물러서 '떠남과 이별과 슬픔과 걱정과 불안과 장차의 문제' 수준 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한차원 더 높은 영적 제자로 육성시키기 위해 마지막 교육을 학습시키는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많은 자식들을 놓아두고 돈벌이를 위해 먼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큰아들 몇명만 불러놓고,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잘 돌보아라. (그리고 훌쩍이는 큰아들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아버지 역할을 할애하니 좀 어른스러워져야지....(그러니) 내가 떠나면서 이런저런 것을 준비해 놓을터니, 그걸 가지고 이런저런식으로 잘 도움(협조)을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고 키우거라....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그 (어린저런)이라는 것이 바로 성령에 대한 주님의 계속적인 말씀입니다. 지난복음과 연결하여 다시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은 사랑과 실천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이 결속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평화에 대한 약속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이와같이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현존은 공동체에게 평화를 주며 사랑에 의해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로 결속을 줄 것입니다.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공동체가 이 평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투쟁하도록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 사명을 생각하며 내 마음을 다져주는 글 하나를 묵상합니다. 박성철님의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中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패배와 절망의 연결고리, 실패와 실망의 연결고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늘 겪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것입니다
패배와 실패를 겪고 난 후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허나 그것들이 비록 기뻐해야 할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그것들에 때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다시피 비오지 않은 후에는 찬란한 무지개가 뜨지 않고
잎의 헌신 없이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 밖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이 약간 미끄러울 뿐이지 낭떠리지는 아니야...'하고.....
일어서십시오
당신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절망의 낭떠러지는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절망은 우리에게 만사가 곤란하다고 가르치니까요
[박성철님의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中에서]
그렇습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떠나시는 고별의 장이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자에게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질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희망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란 누구입니까? 네, 주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기에 아버지도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성령'이란 그리스도의 영, 어버지의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성령)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또 그분(성령)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A)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B)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C)께서 내게(B)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이 복음이 바로 삼위일체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즉, 아버지=나=성령의 관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주님(B)은 아버지(A)가 시킨대로만 했습니다(B=A). 그리고 성령(C)은 주님(B)에게서 들은 것만을 일러줍니다(B=C). 따라서 연역법으로 해석하면 성령(C)은 아버지(A)께서 시킨 일만 하게 됩니다. 고로 A=B=C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논증입니다.
다시 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한(A=B=C)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으며, 그리고 그 성령께서 하실 역할을 말씀주시고 계십니다“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 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 실 것이다”(14, 26)...주님은 이렇게 성령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즉 성령은 가르치는 것과 되새기게 해주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협조자, 곧 성령은 예수님의 계시에 어떤 새로운 계시를 덧붙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다빈치 코드'라는 책부터 시작하여 뉴에이지의 일부 그룹들이 자기계시를 마치 진리의 계시인양 헛소문을 내고 우리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통일교니 해방신학이니, 말기 재림예수니, 등등....많은 사이비들이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마치 계시인양 떠들고 있습니다. 이런 미혹한 시대를 예상하신 주님은 복음에서 분명히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다, 아멘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오로지 주님의 계시를 현존케하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 줄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은 공동체 안에서 교사로서 활동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 자신이 모든 신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타종교인들에게 비해 참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우리 가톨릭인들은 여호와 증인의 밥이라고 누가 그럽니다. 또 개신교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스파링 상대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런 말들이 소문으로 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점집에도 잘가고, 미신에도 양다리를 걸쳐놓고,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가르침(유혹)을 더 따르려고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 보다는, 우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활 제6주간을 보내면서도,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며, 어떤 사람은 십자가(고통) 없는 부활을 바라거나, 고통 없는 사랑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들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양다리를 걸쳐놓은 부족한 신심은 회개치 않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하느님 탓을 하고 애매한 사제들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누구누구는 영성이 부족하다느니...성령이 덜 임했다느니...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빵을 쪼개듯이 조금조금씩 나누어 들어오늘 줄 아는가 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인간적으로 습관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올인(All in)입니다. 쬐끔식 감질나게 하지 않습니다. 샘플로 조금 주었다고 시험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덜 가고...그렇질 않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양의 똑같은 질을 올인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이와같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즉 주님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주님께서 언제든지 오시도록 등잔을 켜 놓고 있는 자..., 그런 사람에게 올인하며 오십니다. 그 성령은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않는 자는 그분(성령)을 모릅니다. 그런데 준비되어 있어 성령을 받은 자는 그분을 확실히 압니다. 우리 주변에 성령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다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성령이 받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예비해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안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교회의 뜻에 순명하는 삶, 성사 안에서 살아가는 삶, 기도하는 삶, 성서를 가깝게 접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비를 일깨워 주실 것이며, 그 신비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행복을 덤으로 선물하실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할은 능동적인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이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우리의 시선을 돌려봅시다....◆
[두올묵상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