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동안 줄곧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우리의 인내와 고신극기, 절제와 희생을 봉헌하였고 이제 구세사의 그 정점(頂點)에 주님과 함께 올라섰다. 이 주간 안에, 특히 성삼일 안에 주님 가르침의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정리되고 완결될 것이다. 십자가의 길과 부활로 이어지는 숨가쁜 여정의 마지막 산등성이를 넘으면서 주님과 함께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 성문을 두드려보자.유다인들은 매년 과월절 축제 때만 되면 수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머물 곳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다니아까지 내려가서 머물곤 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일전에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린 곳이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아에 오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만찬이 베풀어진 곳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세 남매가 사는 집이라고 요한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찬이 한찬 진행 중일 때, 마리아는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라니온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유다의 말대로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매우 비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 발에 발라드린 행위의 이유를 성서에서는 주님의 거룩한 장례를 준비하는 예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마리아 개인에게서는 지극한 사랑을 표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리아 여인의 행동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금까지의 공생활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사랑을 어떻게 했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행하신대로 그 어떤 대가를 염두 해 두지 않고 상대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는 사랑을 복습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오늘 마리아의 행위는 가장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 찬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비싸고 귀중한 것을 예주님께 바쳤을 뿐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복음에서 나오겠지만 주님도 마지막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일을 합니다. 그녀도 주님의 발을 씻겨주는 일을 오늘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자신의 머리로 닦아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복음의 마리아는 일찍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일곱 마귀가 붙었던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녀는 주님을 만났고,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죄 많은 여인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 드릴 만큼 통회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곧 행위를 통해서 들어난다고 합니다. 주님께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 5주간을 보내고 성주간의 신앙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옥합병을 깨뜨리고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러면 지금부터 성주간 월요일 복음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1-11 입니다.
주님은 과월절 이틀 전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게 될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고 에덴동산의 문을 닫으면서 부터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과월절 전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인류를 사랑하시는 순간에도 한편에서는 유다종교 지도자들이 대사제 가아파의 집에 모여서 주님을 죽이기 위해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처치하되, 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과월절에는 주님을 체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체포 사건, 즉 음모와 배반 사건 사이에 감동적인 한 여인의 헌신 사건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음모와 배반이 검은 어둠의 색 이라면, 한 여인의 헌신 사건은 어둠을 비추는 두명한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음모의 독을 뿜어내고 있을 때에, 여인의 헌신은 그 독소를 제거하는 해독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 향유를 붓는 여인, 마리아
복음서에는 한 여인이 주님께 나아와서 기름을 부은 행동을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건은 (루가 7,36-5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의 공생애 초기에 갈릴래아에서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시몬이라고 부르는 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나쁜 여자(죄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 죄인이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사건은 (마태 26,6-13, 마르 14,3-9, 요한 12,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의 공생활 말기에 베다니아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여인이 귀한 향유를 가져다가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은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 털로 그 발을 씼었다고 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가리옷 유다가 향유를 허비한 것을 책망하면서 비난한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녀를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신 후에,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녀의 헌신 사건을 전하여 기념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이 과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아에서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와 마르코는 과월절 이틀 전에 일어난 가리옷 유다의 배신 행위와 함께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요한의 기록대로 과월절 6일 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오와 마르코는 이 여인의 헌신과 유다의 배신을 극적으로 대조하기 위해서 함께 기록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배열은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에 놓인 빛과 어두움의 세력을 극적으로 대조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과월절 6일 전에 주님은 베다니아에 도착하셨습니다. 요한은 그 곳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고징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요한 12,1). 주님께서 그 집에 도착하셨을 때에 그 집에서는 주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때에 마르타는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자로는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요한 12,2).
그런데 마태오와 마르코는 요한과는 좀 다르게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베나디아 문둥이 시몬의 집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나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해서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문둥이 시몬이 나자로의 누이인 마르타의 남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추측이 맞다면 시몬은 문둥이였다가 주님을 통해 치유를 받은 후에 마르타와 결혼한 남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둥이 시몬이 누구이며, 또 왜 그를 문둥이 시몬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휴식처였습니다. 이 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오리정도 떨어진 올리브산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줄곧 이 베다니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과월절 6일 전에 베다니아 문둥이 시몬(마르타)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2.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
그 때에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향유를 식사하시는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요한은 이 때에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자로의 가정은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주님은 친히 죽은 나자로를 살려주셨으며, 또한 마리아의 형부인 시몬의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역시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얼마 전에 오라비가 죽은 일로 인해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책망하지 않고 그녀의 오라비 라라조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때에 그녀는 주님의 은혜와 감격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주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던가, 아니면 아마도 주님께서 마지막 주간에 수난에 대해서 그들에게 예고해 주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마리아는 주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가지 가족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어떤 형태로든지 보답하려고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해야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 동안 주님께 받은 은혜를 꼭 보답하고 싶었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귀한 향유를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주님의 제자 가리옷 유다가 주님을 팔아 넘길 기회를 보고 있을 때에, 그녀는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마리아의 헌신과 가리옷 유다의 배신 사건은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마르코와 요한은 이때에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나르드'는 인도에서 자생하는 뿌리에서 추출한 값비싼 향유입니다. 이 향유는 매우 귀해서 향기를 보존하려고 용기 속에 넣고 밀봉해야 합니다. 대개 이 향유를 담는 그릇은 주전자 모양으로 된 옥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 향유를 사용할 때에는 주둥이 모양의 목 부분을 깨고 향유를 부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 번 사용한 나르드 향은 다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합니다. 이런 고급 향유는 어머니가 딸에게 전해 주는 가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티나에서는 잔치에 초대한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항유는 값이 싼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님께 부은 향은 순전한 나르드향으로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3. 헌신적 사랑에 대한 비난
그 때 주님의 제자 중 한명인 유다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는 것을 보고 투덜거렸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분노를 했습니다. 마태오는 이때에 분노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다고 소개하고 있고, 마르코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때에 분노한 제자를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12,4).
가리옷 유다는 이미 주님을 배반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또는 머리)에 붓는 것을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재정을 맡고 있던 자입니다. 그는 그 여인에게 차라리 그 향유를 팔아서(삼백 데나리온 가치),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습니다(요한 12,5).
대개 유다인들은 절기 때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호 행사를 함께 병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유다의 비난에 대해서 '그 말 자체는 맞는 말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리옷 유다에 의하면 그 향유는 약 300 데나리온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300일을 일해서 버는 큰 돈이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 임금을 5만원으로 계산하는 경우, 300 데나리온은 1500만원에 해당했습니다. 이러한 돈은 가난한 여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돈입니다. 그런 큰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쓰자는 말은 너무나 합당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가리옷 유다의 뜻을 그럴게 순수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고, 그돈을 주님에게 주면 자기는 재정 담당자로서 그돈을 착복해려 했던 것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6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없겠지요? 그지요, 그지요, 그지요......(앵, 대답이 없네......)
4. 헌신적 사랑을 갸륵한 행위로 인정
가리옷 유다의 투덜거리는 말에 주님은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고 하시면서, 그녀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에는 갸륵하다, 선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말을 표현하는 데에는 "아가도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선할 뿐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아름다운 것은 "칼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갸륵한 일을 했다"고 하신 말은 "칼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또 아름다운 일이라는 표현으로 '갸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략한 행동(헌신)이 비난을 받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식의 구제보다는, 당신에게 향유를 부은 일이 더 적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원하면 구제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주님께 헌신할 기회가 없다는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상황에서 마리아가 행한 일은 옳은 일이었다고 변호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헌신을 자신의 시신을 위해 장례를 준비한 일로 받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겠다고 다투고 있었고, 유다는 주님을 팔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반해, 평범한 여자인 마리아는 주님의 죽음을 이해하고 힘을 다해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러한 여인을 비난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5. 보상을 받은 헌신인 사랑
오늘복음인 요한복음에는 기록이 없지만, 마태 26,13과 마르 14,9에서는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오로지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장례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서 최상의 보상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당신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또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 여인의 헌신도 함께 전하여 기념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드린 향유는 과부가 드린 두 렙톤과 같은 진정하고 참된 헌신이었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주님을 감동시켰으며, 또 그것을 듣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녀의 헌신 사건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녀가 주님께 바친 헌신적인 사랑의 마음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첫째, 사랑의 표현은 겸손 자세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복음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행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여인의 주님에 대한 향유사건은 '사랑의 겸허함'입니다. 시편 23편 5절 “(주께서)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한 것처럼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영예의 표시입니.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가 아니라 발에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담고 있는 겸허한 자세임에 틀림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발끈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상대의 신발끈을 매려면 자기 몸(머리)을 낮추어야 끈을 매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머리를 주님의 발아래로 낮추어 온몸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머리의 끝부분인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바닥을 씻어드렸습니다. 이 이상 더 지극하고 겸손한 사랑의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 사랑의 표현은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도덕적인 사랑을 말함)
더우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릴 정도로 자신의 사랑의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즉,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오로지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정을 표현하는데만 열중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등을 전혀 의식치 않으시고 행동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 여인도 남들이 자기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사랑은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서 가장 비싸고 귀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 만큼 상대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표시입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사용했기에 그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복음의 마리아는 일찍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일곱 마귀가 붙었던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녀는 주님을 만났고,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죄 많은 여인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 드릴 만큼 통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녀가 주님에게서 발견한 것은 죄 많은 사람에게로 향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탕자를 맨발로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정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곧 행위를 통해서 들어난다고 합니다. 주님께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많이 받은 많큼 더 사랑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꼭 마리아를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사순의 5주간을 보내고 성주간의 신앙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기간 동안 과연 사랑의 예수님을 만났는지, 또 예수님을 만났으면 무엇을 보았고, 느꼈고, 드렸는지? 그리고 예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며,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서 보고 느낀 것을 생활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지 묵상해야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