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봅니까?
-광주대교구 천정철 신부-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루카 23,18) 바라빠는 바르(Bar: 아들) 압바(abbas: 아빠)의 합성어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바라보는 저에게 이 이름은 한분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바라빠를 풀려나게 하고 십자가형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자녀(바라빠)인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풀어주십니다.
죽음에서 풀려난 이 바라빠가 바로 나임을 당신은 봅니까? 예수님 덕분에 생명을 얻은 바라빠! 그 삶의 여정을 ‘오늘’(구원을 현재화하는 루카복음의 특성) 우리가 걸어갑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23,34) 예수님은 당신을 처형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늘 용서받는 삶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바라빠! 당신은, ‘내가 죽인’ 그분이 ‘나를 살리는’ 무한히 용서하시는 사랑임을 봅니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뉘우치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죄로 인한 절망적인 죽음의 순간조차도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의 현재, 즉 영원한 ‘오늘’이 됨을 봅니다. 바라빠! 당신은 지난날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안에서 당신을 위한 ‘오늘’을 봅니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죽음은 예수님에게 끔찍한 무엇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바라빠! 당신은, 기도 속에서 완전히 내어맡기는 죽음이 삶의 완성임을 봅니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고 고백하며 십자가가 하느님 체험의 자리임을 봅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23,48)갑니다. “의로운 분”의 죽음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그들은 변화된 상태로 돌아갑니다. 제자들조차 도망갔음에도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23,49)고 또한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23,55) 나중에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됩니다.
바라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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