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음 : 요한 8, 51-59
이제는 제법 날씨가 따사로워지고, 낮으로는 덥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꽃놀이나 한 번 다녀들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어린 제가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잠시 아브라함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네들의 모임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이를 가지고 다투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소위 '위세'를 부리는데도, 단체 안에서도 나이가 한 살 많고, 적음에 광분할 때도 많습니다. 그것이 다툼으로 발전해서 온통 난리가 나고, 한 살이라고 어린 사람은 그 앞에서 속이야 어떻든 찍소리도 못하고 그 위세를 다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나이를 따지는 것이 대체로는 내세울 것이 없을 때, 말로는 당할 수 없을 때, 나이를 들먹여서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듯 합니다. 정말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가 상대방을 윽박지를 수 있는 뭐라도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특별히 창세기에 보면(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창세 5,1-32; 11,10-26 등),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참 나이도 많이들 잡수시고 살다가 돌아간 것 같습니다. .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살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에녹의 경우에는 365년을 살았다고 창세기는 전해줍니다. 아마 일년 365일을 가르키는 듯 한데, 하느님과 늘 함께 살았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죽을 때 직접 데려가신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한 번 만나보십시오. 그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을 때가 일흔 다섯 살이었습니다(창세 12,1-9). 그리고 후에 약속하신 아들 이사악이 태어난 때는 그가 백살 되던 해였습니다(창세 21, 1-7).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은 부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 절륜한 정력(?)에 말입니다.
왜 성서는 하느님께서 그런 늙은 사람을 자신이 하시는 일에 일꾼으로 세우셨음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한 번쯤 의문을 가져봄직 하지 않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참인간 부족'이라는 원주민들은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본인이 생각해서 자신이 다른 날보다 변화되었다면, 그 날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그 변화 내지 진보된 사실을 공표하고 축하한다고 합니다. 멋진 생각이 아닙니까?
어르신들이 화를 내실런지도 모르지만, '늙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삶의 체험 속에서 자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싶습니다.
제가 사목하는 웅상지역에는 양로원이 세 군데가 있습니다. 간혹 방문을 해보면, 참 재미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작은 양로원에 한 세상이 들어앉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왜인고 하니, 한 번은 새로 들어오신 분이 있다고 해서, 방문을 했는데, 다른 분들이 신입생을 교육시키고 있더라니까요. 여기가 군대도, 소위 감방도 아닌데, 그런데 더 웃긴 것은 군기반장하시는 분이 자기도 들어오신 지 얼마 안되는 할머니가 그러고 계시더라구요.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아마도 늙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전면에 내세워서, 지금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했나 봅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늙는다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늘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삶, 아브라함처럼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