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27.화
| 요한 복음 8장 21-3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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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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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눈으로 본다면 허찬란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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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찬가로 시작되는 요한 복음은 금광과도 같아 캐도캐도 끝이 없는 보물창고입니다. 복음서마다 읽고 쓰면서 느끼는 바야 다르지만 글의 흐름을 통해 끊임없이 예수님의 신원을 명쾌하게 소개하는 요한 복음은 그 오묘함이 더합니다. 오늘 이야기에도 예수님의 자기 계시 뒤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전합니다. 공관 복음서에 보면 반대자들과 대결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는 인간적이고 수동적인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많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당당하게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소개하는 복음은 끊임없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촉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심판자이심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제로서 나 또한 주님을 믿는 자세로 성무일도 바치고, 묵상하고, 묵주기도 드리고, 미사성제를 올리지만 또 순간순간 나약한 인간 본성의 탓으로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광산에 금이 가득 쌓인 것을 알면서도 멀리서 보고만 있지 그 안으로 들어가 캐는 자세가 덜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생각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주님을 뵈오며 그 안에서 끝없는 기쁨을 체험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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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과 부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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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와 현존을 구분짓는 지표는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재한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에 대한 구분이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에 대해 긍정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라 하더라도 그의 내면과 나의 내면이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내 앞에 있는 그는, 내게 없는 존재이다. … 현존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을 만날 수 없을 때, 그는 나에게 늘 타인이듯, 현존하시지만 내가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지 못할 때, 하느님은 죽으셨거나(사신신학), 혹은 부재(무신론)하시는 분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20세기 전반,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지성인들을 마치 열병에 걸린 듯 전염시킨 ‘실존주의’는 유감스럽게도 신의 죽음을 슬로건으로 삼은 무신론적 사조였다. 전 세계를 피와 죽음으로 물들게 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도대체 신은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제기했던 비수 품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21세기, 이제 우리는 신의 죽음을 ‘겁 없이’ 선고하기에 앞서 짚어봐야 했던 것은 없었는지,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 것’과 ‘실제적 부재’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는가를 다시금 성찰한다. 나(인간)의 역량 부족으로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하느님)가 부재한다고 단정지었던 만용은 전적으로 인간인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혜윤 | 생활성서사 | <생손앓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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