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봉헌생활의 의미[류해욱신부님] 2007.03.27

2007. 3. 27. 오후 1:30:32

글자

봉헌생활의 의미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봉헌생활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샤를르 드 푸코의 기도문이다. 봉헌생활이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삶이다.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봉헌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밑바탕의 공통적인 원동력은 푸코의 표현대로 ‘그분의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랑’이다. 그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유하고 독특한 삶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을 내어맡기는 봉헌의 삶을 살게 된다.

  “봉헌생활에 대한 서약을 하지 않더라도 사랑과 복음화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시급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왜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 라는 사람들의 물음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복음 12장의 ‘베다니아의 향유 이야기’에서 “이 향유를 팔았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턴데…….”라는 효용성의 가치에 대해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요한 12, 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가장 적절한 대답이라고 하셨다.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쏟아 부은 마리아의 향유는 모든 가치를 직접적인 효용성과 성과물로 판단하는 현대의 실용주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표징이다. 만일 교회가 이웃을 위한 순수한 헌신과 봉헌생활 같은 구체적인 표징이 없다면 교회는 사랑이 사라지게 되고 신앙은 ‘소금’의 짠맛을 잃게 된다.

  교회는 인간이 지닌 진정한 가치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봉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징이 삭막한 사회를 적시는 단비가 되어야 하고 무너지는 인간관계를 곧추 세우는 지지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판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봉헌생활이 원래의 부르심대로 나아가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끊임없이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가장 먼저,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신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소외받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죄인들에게서도 그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가장 낮은 사람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기에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    

  봉헌생활의 원동력은 ‘그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밝은 빛 속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둠과 고통 속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이 봉헌생활의 표징이자 세상 속에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환히 드러내는 것이다. 

  작고 가난하지만 오롯이 그분께 들어올려진 봉헌된 마음이 다시 어두운 세상 낮은 곳을 향하여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눈이 될 때, 세상은 조금 더 밝고 따뜻해 질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 봉헌생활의 참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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